<홍석우의 보이후드> 글로벌 시대, 한국 홀세일 브랜드의 경쟁력과 과제
2018-06-01 yourboyhood@gmail.com
홍석우 패션 에세이스트

2005년, 압구정동 갤러리아백화점 웨스트(West) 4층에 국내 남성복 디자이너만으로 구성한 편집매장 '맨 지디에스(MAN gds)'가 문을 열었다. 김서룡, 홍승완, 정욱준 그리고 서상영까지 당대 가장 주목받은 한국 남성복 디자이너를 모은 편집매장은 당시 큰 화제를 불러 모았다. IMF 금융위기 이전, 전에 없던 호황을 누린 기성 디자이너들과 '이후' 세대를 구분한 사건이었다.


'론 커스텀'으로 마지막 서울패션위크 컬렉션을 성대하게 치르고, 브랜드 이름을 '준지(JUUN. J)'로 바꾼 2007년 어느 날, 아직 한적하던 가로수길 론 커스텀 2층 스튜디오에서 정욱준과 마주 앉았다. 왜 이름을 바꾸었는지, 어떻게 '준지'라는 새로운 레이블로 발전해나갈 것인지, 새로 만든(모델 이수혁이 입은, 실루엣을 변형한 트렌치코트 사진이 강렬했던 표지의) 룩북이 프랑스 파리 패션 관계자들 사이에서 어떠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는지, 그리고 왜 '파리 컬렉션'인지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론 커스텀이 스트리트 패션을 받아들이던 접점이 '준지'의 시작이었다. 이후 '준지'는 지금까지 파리 패션위크 무대에 서고 있다. 전 세계 유명인부터 유수의 패션 관계자들이 준지의 새로운 컬렉션에 찬사를 보낸다. 정욱준은 세계 무대에서 특별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선구적인 한국 디자이너 중 한 명이 됐다.


정욱준 '준지' CD


‘준지’ 이후의 한국 패션
첫 번째 파리 패션위크 데뷔를 앞둔 정욱준은 여러 패션 쇼룸에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보내고, 직접 파리에 가서 에이전시 사람들과 대화하고, 글로벌 비즈니스를 함께 할 파트너의 선택을 기다렸다. 유망한 예술가들과 협업하고, 유명한 잡지에 화보와 인터뷰를 이어가는 지금을 떠올리면 뜻밖일 수도 있다. 케이팝 K-Pop 열풍이 불기 전 서울은 패션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 도시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패션 바이어가 대다수였다. 그 시절 한국 패션 브랜드가 세계 시장에 진출한다는 것은 브랜드를 알리기 이전, 일종의 국가 대표가 된다는 심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성공적으로 파리 무대에 진출한 이래 삼성물산(구 제일모직)의 지원을 받아 여성복을 새롭게 추가하고, 세계적인 패션 전문지 <비즈니스 오브 패션 Business of Fashion>이 선정한 세계 500대 패션 인물에 오른 지금의 정욱준이 개척한 길은 이미 존재하는 주류 시스템에 들어가 다시 처음부터 차근차근 밟아 오른 결과였다. 물론 눈부시게 빛나는 재능과 디자이너의 정체성을 훌륭하게 섞어낸 브랜딩이 뒷받침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준지가 파리에 데뷔한 지 1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 바야흐로 글로벌 패션 시대의 맞이한 한국 패션은 어떻게 세계의 문을 두드리고 있을까? 2015년 데뷔 10주년을 맞은 남성복 브랜드 '디그낙'과 세컨드 레이블 '디바이디'의 디자이너 강동준은 '2005년 세대' 이후 한국 남성복 시장의 변천을 손수 겪은 산 증인이다.


2008년 가을/겨울 서울 패션위크에서 첫 컬렉션을 선보인 이래, 후배 디자이너들의 외국 진출이 결실을 보기 전부터 그는 뉴욕과 런던, 밀라노 등지에서 패션 박람회와 쇼룸  비즈니스에 사운을 걸었다. 2011년에는 국내 비즈니스를 잠시 중단하고 외국 비즈니스에 집중하기도 했다. 강동준은 한국 비즈니스와 글로벌 홀세일 비즈니스의 균형을 이루고자 스트리트웨어의 흐름을 받아들인 최초의 한국 남성복 디자이너 중 한 명이었다.


"수년 전 한국 남성복 시장의 한계를 느꼈을 무렵에는 시장 요구를 따라가는 데 지쳤어요. 하지만 외국 시장으로 방향을 틀면서 진정 내가 잘할 수 있는 남성복은 무엇인가, 초심부터 배울 수 있었죠. 그리고 다시 국내 남성복 시장을 공부하면서 예전보다 훨씬 다양해진 패션을 체감하고 있습니다."


강동준이 처음 글로벌 홀세일 비즈니스를 시작했을 때, 자신의 브랜드에 맞는 쇼룸이나 패션 박람회에 관한 정보는 몹시 부족했다. 체계적인 노하우와 정보를 얻기에는 피상적인 경험만을 지닌 선대 디자이너들의 맥이 끊겨 있었다. 그는 '경험'으로 부딪히며 지금 자리에 섰다. 고스, 스트리트웨어, 현대적인 테일러링이 섞인 '디그낙' 컬렉션은 국내보다 외국 시장에 유효했다. 현재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온라인 편집매장 중 하나인 센스 SSENSE.com에는 '디그낙'과 '디바이디'가 가장 주목받는 글로벌 브랜드와 함께 경쟁하고 있다.


한국 스트리트 웨어, 그들만의 방정식
2010년 이후 소위 '하이엔드 스트리트웨어'가 패션계에 끼친 영향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오프화이트'의 버질 아블로 가 '루이비통' 남성복 아티스틱 디렉터 자리에 오르고, 스트리트웨어 브랜드와 활발히 협업하는 글로벌 스니커즈 시장도 거대해졌다. 소위 명품 브랜드가 스트리트웨어와 융합을 시도하고, 하이엔드 스트리트웨어를 걸친 힙합 스타들이 업계의 가장 중요한 인플루언서가 됐다.


지금 전 세계 젊은이들은 '구찌'와 '버버리', '꼼데가르송'을 '슈프림'과 '스투시' 같은 스트리트웨어와 함께 걸친다. 유럽 럭셔리 브랜드가 '유산'으로 부르는 세월의 경쟁력은 10년 전보다 현저하게 낮아졌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는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 안에서 쉽게 보고 쉽게 잊는 밈과 닮은 패션에 열광한다. 가장 중요한 점은 '재미'이며, 어느 도시와 국가에 기반을 두었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파리와 런던, 뉴욕과 밀라노가 아닌 제3세계 패션 브랜드가 글로벌 시장에 진출하는 문턱도 낮아졌다. 이는 곧 한국 패션 브랜드가 글로벌 시장에 진출하는 방법의 변화와 직결한다.


'디스이즈네버댓'은 2009년 설립한 스트리트웨어 브랜드이다. 독보적일 정도로 훌륭한 콘셉트와 다음 시즌이 기다려지는 영상과 룩북 lookbook의 완성도, 젊은이들에게 특히 접근성 높은 가격대는 비슷한 범주의 패션 브랜드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홍대 입구 서교동 외진 골목 매장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붐빈다. 그 절반은 일본과 중국 등 외국 고객이다. 그렇다고 외국을 대상으로 한 글로벌 마케팅에 차별점을 두었는가 하면, 결코 아니다. 그저 남들과 뚜렷이 다른 색깔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휘갈긴 메시지를 자수 놓은 야구모자와 브랜드 이름을 곳곳에 적은 패딩 코트, 빳빳하게 직조한 자체 원단을 쓴 후드 파카와 스웨트셔츠만으로 '디스이즈네버댓'은 한국 스트리트웨어 대표주자가 됐다. 케이팝과 하이엔드 스트리트웨어가 유행하며 한국 패션을 향한 관심이 폭발한 것은 좋은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과 웹 스토어에서 '한국적'인 요소는 찾기 어렵다. 인스타그램에 공개하는 발매 일정부터 거의 모든 포스트는 이모티콘과 영어로 작성한다. 수천 개는 기본으로 찍는 '좋아요'는 곧 한국 스트리트웨어 브랜드의 가능성을 알아본 패션 뉴 미디어의 이목을 끌었다.


세계적으로 수많은 팬을 보유한 데일리 패션 뉴스 웹사이트, '하입비스트'는 '디스이즈네버댓부'터 '라이풀'과 '커버낫' 같은 한국 스트리트웨어 브랜드 소식을 수시로 올린다. 과거 어느 시점 '일본 스트리트웨어 브랜드의 아류'로 평가받던 한국 스트리트웨어 브랜드들은 이제 '하입비스트'가 직접 운영하는 온라인 편집매장 HBX에서 만날 수 있다.


스트리트웨어에 기반을 두고, 남성복과 액세서리부터 여성복과 스포츠웨어 브랜드의 협업 아이템을 동시에 거느린 지금의 한국 스트리트웨어 브랜드들은 고급 기성복보다 높은 경쟁력과 합리적인 가격대로 무장했다. 소셜 미디어의 열광적인 반응들은 글로벌 바이어들이 가장 우려하는 시장성에 관한 고민을 잠재웠다. 앞선 한국 패션 디자이너 중에는 쇼룸과 패션 박람회 비즈니스를 수차례 거치고도, 냉정한 바이어들의 반응에 글로벌 진출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았다(이는 여전히 벌어지는 현상이며, 국내외라고 크게 다를 건 없다). 스트리트웨어 브랜드들은 고급 기성복 업계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 자자국에서 먼저 팬덤을 만들고 시장성을 확보한 후, 자연스럽게 외국 매체나 창작자들과 교류하며, 홀세일 가격 책정에 손해 보지 않는 판단으로 국외 진출을 이뤄낸다.


'디스이즈네버댓'은 지난 3월 삼성패션디자인펀드 SFDF 후원으로 서울패션위크 런웨이 데뷔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컬렉션 직후 만난 최종규 디렉터는 "런웨이 무대가 딱 맞는 방식은 아니지만, 경험해볼 가치가 충분했다"고 했다. 사람들이 기대한 특유의 스웨트셔츠와 후드 파카, 긴 패딩 재킷과 트레이닝 팬츠는 여전했다. 고어텍스 소재를 쓰고 로고를 대담하게 넣은 스트리트웨어 셋업, 그리고 '알파인더스트리'와 협업 한 MA-1 재킷은 빠짐없이 올가을 발매할 것이라고 했다.


성공한 스트리트웨어 브랜드들은 탄탄한 생산과 판매 시스템을 갖추고, 홍콩과 일본, 런던 등지에서 연락 오는 편집매장에 입점한다. 아직도 소규모 패션 브랜드에게 이러한 방식은 먼 나라 남의 얘기다. 하지만 세계 최대 패션 시장을 갖춘 일본의 '언더커버' 와 '사카이'  같은 디자이너 브랜드가 유럽과 북미 시장에 진출한 과정을 생각하면, 내수 시장이 불황이라고 해도 간과할 문제는 아니다. 먼저 국내 시장에 탄탄한 기반을 두고, 브랜드 콘텐츠와 정체성을 확립하며 신중하게 외국 시장을 두드리는 길은 멀지만 돌아갈 값어치가 있다.


국내외의 넓은 팬덤을 알 수 있는 '디스이즈네버댓'의 인스타그램


‘로우클래식’과 ‘로크’
이는 비단 한국 스트리트웨어만의 방식은 아니다. '로우 클래식'의 이명신 디자이너는 서울에 기반을 둔 여성복 디자이너 중 플래그십 스토어를 통해 인상적인 발자취를 남겨 왔다. 현실적으로 대기업을 제외한 패션 브랜드가 플래그십 매장 위주로 비즈니스를 전개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한국 패션 유통 구조가 오래도록 백화점 중심이었고, 모바일 기반으로 변하고 있지만 여전히 대형 온라인 쇼핑몰에는 현기증 날 정도로 많은 브랜드가 모여 있다.


이런 환경 속에 '로우 클래식'은 일찍이 브랜드가 지닌 이야기에 합리적인 가격대를 제시하는 전략을 취했다. 이십 대 초반, '로우 클래식'을 지지하던 여성들은 이제 함께 나이를 먹어가며 좀 더 성숙해진 브랜드와 발을 맞춘다. 스트리트웨어 감각에 익숙한 젊은이들은 패션뿐만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에 초점을 맞춘 세컨드 레이블 '로클'에 마음을 연다. 국내 시장의 탄탄한 지지를 바탕으로 로우 클래식은 외국 시장으로 눈을 돌린다. 이명신은 지금까지 먼저 관심을 보인 바이어나 쇼룸들이 많았지만, 아직 본격적인 준비에 나서진 않았노라고 했다.


"2015년까지 외국 진출을 소극적으로 생각했어요. 정작 한국 시장에 소홀해질 수 있으니까요. 일정 수준 이상으로 국내 비즈니스를 탄탄하게 키워야지 외국에서 더 지지를 얻을 수 있잖아요. 명동 플래그십 매장도 이런 생각의 연장이에요."


'로우 클래식'은 2016년도 봄/여름 시즌을 끝으로 서울 패션위크 참여를 잠시 중단하고, 직접 파리에 나가 2016년도 가을/겨울 시즌을 위한 독립 쇼룸을 연 경험이 있다. 현지 사정을 잘 아는 친구들을 에이전트로 두고, 구체적인 성과보다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관해 값진 조언을 얻었다.


"서울에서 처음 시작했을 때를 생각하고, 현지 친구들에게 확 다가설 방법을 떠올려보라더군요. 파리와 밀란, 런던에 있는 에이전트들의 공통된 의견이었어요. 주저하게 된 부분도 있거든요. 좋은 평판의 쇼룸이 한국 디자이너들에게 높은 수수료를 요구하기도 하고, 주류 디자이너가 아니면 밀어주지 않아서 이도 저도 아니게 된 얘기도 들었죠. 결국, 계속 소통하면서 애초에 우리를 밀어줄 수 있는 쇼룸을 찾자고 결론 내렸어요. 신중하게, 장기전으로 봐야죠."


LVMH 프라이즈 2018의 결선에 오른 황경록 '로크' 디자이너


서울에 기반을 둔 패션 디자이너들이 글로벌 진출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동안, 반대로 디자이너가 공부한 도시에 둥지를 틀고 차근차근 이뤄낸 사례도 있다. 자신의 이름 글자를 딴 여성복 브랜드 '로크'를 만드는 디자이너 황경록은 센트럴 세인트 마틴 디자인 대학 석사 졸업 후, 피비 파일로가 막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은 '셀린'에서 디자이너로 경력을 시작했다.


"'셀린'은 옷의 형태와 착용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브랜드여서, 배울 점은 물론 상호작용과 상승효과가 큰 경험이었어요."


이후 여러 패션 브랜드와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쌓은 그는 지금 신중하게 '로크'를 만들고 있다. 그가 처음 세일즈에 뛰어든 2016년도 가을/겨울 시즌에는 작은 여성복 브랜드의 디자이너로서 직접 모든 것을 챙겼다. 바이어와 관계자들에게 연락을 취하고, 파리 패션위크 기간 중 쇼룸 장소만 차려서 시작했다. 
 
첫 시즌을 마친 후, '로크'의 컬렉션을 인상 깊게 본 '트웬티포세븐 쇼룸(247 showroom)' 디렉터가 자신의 쇼룸에 게스트 디자이너로 초대했다. 컬렉션 무대가 브랜드를 외적으로 알리는 자리라면, 쇼룸은 실제 구매와 상담이 이뤄지는 곳이다. 이를테면 모든 비즈니스가 실제로 이뤄지는 전장과 다름없다.


"'다미르 도마'와 '겐조'처럼 좋은 브랜드가 속한 쇼룸에서 예상보다 좋은 반응을 얻고 있어요. 요즘 유행처럼 화려한 스타일은 아니지만, 직접 옷을 보고 흥미를 나타내거나 좋은 소재에 반응하는 분들이 계세요. 처음에는 '쇼'를 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많이 걱정했는데, 새로 만난 바이어들이 좋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학창 시절 그는 남성복으로 학사 졸업 후 석사 과정을 여성복 전공으로 마쳤다. 그래서인지 고전적인 테일러링을 바탕에 두면서 남성 디자이너 시각으로 여성미를 포착하는 데 능하다.


"전형적으로 '예쁜' 느낌은 아니죠. 고전 classic 의복에 전위적 요소를 동시에 지닌 여성복이 '로크'의 특징입니다."


한눈에 봐도 단단해 보이는 만듦새에 실크와 비스코스, 면을 아우르는 우아하고 다양한 소재로, 절개가 아름답게 들어간 소매와 변형하여 입도록 옷 내부에 넣은 단추와 끈이 흥미롭다. 그렇다고 마냥 전위적이진 않다. 남성복을 떠오르게 하는 손길이 깃들어 오히려 서늘하고 차분한 기운이 감돌고, 어느 때나 편하게 입기 좋은 이브닝드레스와 니트웨어도 함께한다. 화려한 색과 눈에 띄는 그래픽에 익숙한 젊은이들이나 요즘 디자이너들과는 조금 다른 감각과 방향이다.


2019년도 봄/여름 컬렉션 준비로 분주한 '로크'는 2018년도 'LVMH 프라이즈 2018' 최종 8인에 들었다. 그는 지금도 파리와 런던을 오가며 원단을 직접 고른다. 처음 쇼룸 비즈니스에 진출했을 때는 바이어 미팅부터 서류 작업을 일일이 챙겼지만, 이제는 세계적인 패션 홍보 에이전시 'PR 컨설팅 파리(PR Consulting Paris)'가 홍보를 맡아 한결 수월해졌다.


1년에도 수십, 아니 수백 명의 디자이너가 컬렉션을 만드는 치열한 업계에서 그는 졸업 동기와 동료들이 뜨고 지는 모습도 보았다. 그래서 더 천천히 가고 싶었다고 했다. '가고 싶은 방향이 아니라면'이라는 전제를 달고서 말이다.


"사실 젊은 디자이너가 처음 브랜드를 시작할 때 유혹도 많죠. 그만큼 경험 없이 패션쇼부터 시작해서 금세 사라지는 브랜드도 많아요. 원하는 모델을 고르고, 신중하게 쇼룸과 관계하고, 더 좋은 소재를 위해 꾸준히 회사들과 소통하고…. 남성적인 요소가 거부감 없이, 여성적인 실루엣을 내포한 여성복. 테일러링이지만, 여성이 아름다워 보이는 옷을 꾸준히 만들고 싶습니다."


세계화의 단서는 ‘옷’과 ‘브랜드’에 있다
세계 패션 시장은 수많은 디자이너와 브랜드가 치열하게 경쟁하며 변하고 있다.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개성 넘치는 한국 출신 디자이너들도 늘어났다. 데뷔 프레젠테이션을 서울에서 치르고도 세계적인 편집매장들에 입점한 강혁, '나인티나인퍼센트이즈' 로 퍼렐 윌리엄스와 지드래곤을 고객 명단에 올린 바조우, 그리고 국적을 알 수 없는 청년 문화 친화적인 이미지 작업으로 이미 글로벌 팬덤을 보유하며 '메종 키츠네'와 캡슐 컬렉션을 만든 '아더 에러'는 스트리트 패션과 하이패션을 고루 경험하며 시장의 다양한 요구에 발 빠르게 대응하는 동시대 한국 패션 디자이너의 지금을 대표한다.


특정 지역 오프라인 패션 매장들이 온라인 매장에 점점 주도권을 내주는 현상 또한 격변하는 패션 시장의 면모다. '루이자비아로마 '와 '센스' '매치스패션' 같은 모바일 패션 시장의 신흥 강자들은 검증된 패션 하우스부터 가능성이 보이는 젊은 디자이너에게 항상 문을 열어두고 있다. 사람들의 쇼핑 패턴도 '직접 입어보고, 온라인 매장에서 구매하는' 식으로 바뀐다(오프라인 매장에게 달가운 소식은 아니다). 오프라인 유통의 경직성이 주는 한계와 소규모 브랜드의 생산비 문제는 여전하지만, 과거처럼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외국 시장을 두드리지 않는 성공 사례 역시 모바일 시대와 함께 속속 등장하고 있다.


마지막 단서는 글로벌 패션 플랫폼으로 진화 중인 소셜 미디어에 있다. 과거 단문의 글 위주였던 1세대 소셜 미디어는 짧은 영상과 사진부터 자체 온라인 매장에 직접 연결하는 기능까지 갖추며 불특정다수의 소비자와 직접 연결하는 채널로 거듭났다. 급증한 영향만큼 사용하는 단어 하나까지 고민하거나, 피로를 호소하는 등의 반작용도 늘었지만, 이를 통한 '자기 홍보' 기능은 이미 존재하는 패션 시스템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브랜드를 세계로 알리는 중요한 창구가 되었다.


'세계화'라는 단어가 어느 때보다 가까워진 지금, 사람들은 새로운 패션 브랜드를 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손쉽게 패션 브랜드를 전개하는 시대란 곧 더 치열한 글로벌 경쟁과 차별하기 어려운 변별력과 맞닿아 있다. 2018년의 패션 브랜드는 국내외 고객과 바이어에게 직접 홍보할 수 있는 독자 채널을 바탕으로, 10년 전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변화를 바라본다. 세계로 쉽게 다가설 수 있는 도구를 한 손에 쥔 채, 매력과 정체성을 선명하게 드러내야 하는 '옷'과 '브랜드'라는 과제가 더욱 중요한 시대가 오고 있다.




'아더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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