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우의 보이후드> 한국 패션 지원 정책의 성과와 한계
2018-04-15 yourboyhood@gmail.com
홍석우 패션 에세이스트

뉴스에서 경기가 나아졌다는 얘기를 찾기는 어렵다. 범주를 패션으로 좁히면 몇몇 패션 전자상거래 업체와 대형 패션 브랜드가 소위 ‘대박’ 시즌을 보냈다는 얘기만 소소하게 보도된다. 그 물결이 영세한 신진 디자이너들까지 미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까다롭고 변덕스러운 소비자들은 젊은 디자이너들을 응원하기 보다는 자신의 쇼핑 목록과 입맛에 맞는 적당한 가격의 옷을 구매한다. 생존을 건 싸움 속에서 젊은 디자이너들은 여러 패션 지원 정책을 찾게 마련이다.

‘2018 F/W 헤라서울패션위크’ 가 지난달 24일 막을 내렸다. 눈에 띄는 스타 디자이너와 브랜드가 서울에 하나뿐인 공식 패션위크에서 서서히 모습을 감추는 것은 놀랍지 않다. 다만 온라인과 모바일에서 새로운 고객을 창출해내면서 어느 정도 시장을 선점한 패션 브랜드의 참가가 늘었다. 이들은 수년 전만해도 신진 브랜드 꼬리표를 달았다.

지난 3월 처음 서울패션위크 무대에 선 ‘디스이즈네버댓’과 이미 굳건한 팬덤을 보유한 여성복 브랜드 ‘로우클래식’은 각각 스트리트웨어와 데일리웨어의 경계부터 이제 막 20대에 접어든 밀레니얼 세대까지 폭넓게 수용하는 그러한 브랜드다.


‘디스이즈네버댓’은 삼성물산패션부문의 sfdf 후원으로 2018 F/W 헤라 서울패션위크 무대에 섰다.


‘디스이즈네버댓’은 또한 서울디자인재단의 패션 지원사업 ‘서울패션창작스튜디오’ 졸업생이다.


SFW의 숨은 별 ‘디스이즈네버댓’ ‘로우클래식’의 교집합은?
‘디스이즈네버댓’과 ‘로우클래식’이 만드는 옷은 한 번이라도 두 브랜드를 본 이들이라면 접점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전혀 다르다. 하지만 이 둘에는 교집합이 있다. 서울디자인재단의 패션 지원 사업인 ‘서울패션창작스튜디오’를 졸업했다는 점이다. 만약 ‘로우클래식’의 이명신 디자이너가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의 유명세에만 기댔다면, 지금의 ‘로우클래식’은 없을 것이다. 그는 2010년 갓 시작했던 서울패션창작스튜디오 1기 졸업생이다. ‘디스이즈네버댓’의 조나단 대표와 최종규 디렉터는 뒤를 이어 2기로 졸업했다.


서울패션창작스튜디오는 1년에 한 차례 심사와 수차례의 중간 평가 과정으로 입주자를 모집한다. 동대문 유어스 건물에 자리한 스튜디오에는 현재 14, 15기의 약 30개 팀이 입주했다. 이 곳에는 패션 라이브러리, 일반인이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작업 공간과 법률 상담소와 디자이너 개별 사무실과 촬영 스튜디오, 쇼룸과 공동 작업 공간 등이 있다. 단지 공간을 무료로 빌려주는 데 그치는 것은 아니다. 다년간 운영으로 노하우와 시행착오를 거친 서울패션창작스튜디오는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하는 신진 디자이너들에게 필요한 인프라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한국의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가장 요원한 두 가지는 ‘홍보’와 ‘생산’이다. 서울패션창작스튜디오는 오프라인 유통업체들과 주기적으로 팝업 매장을 열고, 굴지의 홍보 대행사와 연 단위로 계약하여 매체 노출을 도모하거나 주기적인 트렌드 교육을 주선한다. 특히 지적 재산권 및 상표 등록에 관련하여 전문 법리사들의 무료 상담을 주선하는 정책은 인상 깊다. 대체로 1인 기업 형태로 출발하는 패션 디자이너들은 디자인과 생산만으로 벅차다. 이는 히트 아이템의 ‘카피’ 제품이 시장에 나오기 전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방편이 된다. 그 밖에도 매년 상·하반기 업계 전문가들을 초대한 품평회를 연다. 높은 평가를 받은 브랜드는 100~700만원까지 활동비를 차등 지원받는다.


현재 14기 입주 디자이너로 서울패션창작스튜디오에 입주한 여성복 브랜드 ‘720(칠이공)’의 김란아 디자이너는 공간을 얻는 것 이상으로 이로운 점이 많다고 했다.

“여기 들어오면서 비슷한 디자이너들과 대화하고 정보를 얻기도 한다. 서울에서 디자이너 브랜드를 만든다는 것은, 단순히 디자인만이 아니라 홍보와 마케팅, 판로 개척과 해외 시장 진출 등 다양한 방면을 신경 쓰는 일이다. 이곳은 홍보대행사를 통한 스타 마케팅과 협찬도 진행하지만, 하나의 브랜드가 갖춰야 할 시스템, 즉 어떤 부분이 필요하겠구나, 스스로 공부하도록 도와준다.”


주객 전도되는 ‘패션 지원 사업’
서울패션위크에서 명목만 앞세우고 검증되지 않은 바이어와 프레스를 잔뜩 부르던 관행은 눈에 띄게 사라졌다. 실제로 서울패션위크에 초청받아 참석하는 외국 매체와 바이어 수준은 소위 4대(뉴욕, 파리, 런던, 밀라노) 패션위크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사석에서 만난 미국 유명 패션 매거진 에디터는 서울패션위크 기간 중 매일 6~7개 컬렉션을 보고, 그중 일부를 스케치 기사와 함께 올릴 예정이라고 했다.


베를린의 유명 편집매장이자 고루한 편집매장 구조를 혁신했다는 평을 받은 안드레아스 머커디스는 수년간 직접 서울패션위크에 참석했다. 올 상반기에는 베를린 매장에서 유럽 매체와 VIP 고객을 초대해 한국 브랜드를 선보이는 일종의 쇼룸 이벤트를 연다. 서울패션위크 무대에 오른 디자이너 중 심사를 거쳐 선정한 디자이너 열 명은 매년 ‘텐소울’이라는 이름으로 외국 패션 박람회와 팝업 매장 개최 등 지원 혜택을 받는다.


런던 셀프리지 백화점, 파리 편집매장 레클레어 등이 이미 파트너십을 맺었고, 올 하반기에는 미주 지역에서 팝업 행사를 개최할 예정이다. 텐소울에는 박승건의 ‘푸시버튼’ , 이주영의 ‘레쥬렉션’, 강동준의 ‘디그낙’, 김무홍의 ‘무홍’, 정미선의 ‘노케’처럼 이미 실력을 검증 받은 패션 디자이너들과 한현민의 ‘뮌’, , 박지선과 신규용의 ‘블라인드니스’, 박환성의 ‘디앤티도트’, 김은혜와 우진원의 ‘로켓런치’, 조은혜의 ‘부리’처럼 이제 막 잠재력을 인정 받은 신진 디자이너들이 고루 뽑혔다.


패션 디자이너 지원 정책에 밝은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텐소울 프로젝트 첫 회부터 몇 차례 출장으로 참석한 경험이 있다. 첫 회는 디자이너들이 실제로 원하는 ‘구매’와 연결되지 않은 국내 매체 홍보용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지금은 문을 닫은 베를린 브레드앤버터 박람회는 아예 ‘서울 패션’ 공간을 별도로 만들고 디자이너들의 컬렉션을 홍보했지만, 해외 바이어들의 호응을 끌어내기는 부족했다. 관 주도의 보여주기 행사와 비전문가들의 ‘감 놔라 배 놔라’식 조언에 회의를 품은 디자이너도 있었다. 하지만 외국 패션 매장과 관계를 트는 데는 현실적으로 시간이 걸린다. 한 시즌이 마음에 든다고 자국에서 검증되지 않은 신인 디자이너 브랜드에 투자하는 바이어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텐소울 정책 지원 사업에 들어간 금액이 적지 않음에도, 실제 디자이너 브랜드에 투입하는 금액보다 공간 임대료와 진행 인건비, 프레젠테이션과 정책 홍보 등 부대 비용으로 주객을 전도하는 점은 진지하게 고민할 숙제이다.


지난해 10월 런던 셀프리지 백화점에서 열린 ‘텐소울’ 팝업


SFDF&sfdf에 거는 기대
한국 패션 기업 중 지원 사업에 가장 활발하며, 권위 있는 시상식을 보유한 곳은 삼성물산이다. 패션은 결국 ‘민간’ 사업이지만, 젊은 디자이너에게 투자하고 발굴하여 더 넓은 파이를 공유할 수 있는 책임이 국내 패션 대기업에 요원하다는 현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적게는 1년에 수천억에서 조 단위 매출을 올리는 패션 기업 중, 삼성물산의 ‘삼성 패션 디자인 펀드 (SFDF)’를 빼면 크게 생각 나는 지원 사업이나 정책은 거의 없다.


제일모직 시절인 2006년 시작하여 매년 꾸준히 패션 디자이너들을 지원하는 SFDF의 수상자 명단에는 서혜인과 이진호, 박종우, 정고운, 정지연, 이승준, 표지영, 스티브 제이 앤 요니 피, 최유돈, 최철용, 허완, 계한희 등 이미 국내에서 성과를 이룬 패션 디자이너들과 국외 활동으로 전문가들의 높은 평가를 받은 디자이너들이 포진해 있다.


특히 2009년부터 2011년, 이례적으로 세 차례 연속 수상한 정욱준은 파리패션위크 진출과 맞물려 ‘준지’를 ‘세계적으로 알려진 몇 안 되는 한국 패션 브랜드’로 알림과 동시에, 삼성물산 소속으로 매장 전개와 활동 지원을 전폭적으로 받은 일종의 성공 사례가 되었다.
2018년은 SFDF의 중요한 변곡점이다. 지금까지 SFDF는 이미 외국에 거점을 두거나, 외국에서 사업을 전개하는 ‘글로벌 브랜드’를 키우는 데 골몰했다. 2017년부터 국내에서 활동하는 브랜드를 대상으로 총상금 1억 원 규모의 ‘sfdf(스몰 SFDF)’를 공개 모집하기 시작했는데, 1회 sfdf에 선정된 열 개 브랜드 중 1위를 차지한 ‘디스이즈네버댓’은 상금과 함께 2018 F/W 헤라 서울패션위크에서 첫 번째 런웨이 무대를 가진 바 있다.


‘활발하고 실질적인’ 해외 패션협회의 지원사업
세계 최고 패션 디자이너들이 자웅을 겨루지만, 그만큼 경쟁이 치열하고 텃세 역시 만만치 않은 파리패션위크와 달리, 런던패션위크는 젊은 디자이너들이 재정적 배경과 관계없이 한순간 ‘스타 디자이너’로 떠오르는 몇 안 되는 장소다. 런던패션위크를 주관하는 영국패션협회는 1983년 설립한 비영리 유한 회사로, 단일 기관 통합 이전에 런던패션디자이너협회(1941년 설립)와 의류수출위원회(1965년 설립), 런던모델하우스그룹(1958년 설립) 등 반세기 넘는 역사를 지닌 단체들이 공동 출자한 협의체다.


이 기관은 여성&남성 런던패션위크는 물론 신진 디자이너를 후원하는 패션 어워드를 함께 선보이며, ‘영국패션협회/보그 디자이너패션기금’과 영국패션협회교육재단, 예술위원회 등의 지원 사업은 업계에서 잔뼈 굵은 실무자 집단 및 컨설턴트와 함께 자국 패션 디자이너의 성공적인 발판을 도모한다. 특히 영국패션협회는 자국에 기반을 둔 패션 디자이너라면 국적과 관계없이 열린 자세로 지원을 돕는다. ‘셀린’에서 피비 파일로를 보조하며 실력을 키운 황경록 디자이너는 자신의 여성복 브랜드 ‘로크’를 내기 전, 영국패션협회로부터 실제적이고 유효한 지원을 받았다고 했다.


‘로크’는 ‘루이비통 재단’이 주최하는 2018년 ‘루이비통 모에헤네시 상(LVMH PRIZE)’의 최종 8인에 들었다. ‘창작을 위한 열정’이라는 주제로 전 세계에서 신청을 받는 LVMH 프라이즈는 동시대 가장 권위 있는 패션 어워드로 거론된다. 결선 진출만 해도 LVMH가 보유한 수많은 패션 하우스 아티스틱 디렉터들의 조언과 유명 패션 매체의 주목을 받는다.


역대 수상자 중에는 ‘후드바이에어’와 ‘헬무트 랑’의 리뉴얼 작업에 깊숙이 관여한 셰인 올리버 같은 디자이너도 있다. 2014년에 시작했기 때문에 미국패션디자이너협회(CFDA)처럼 한발 앞서 패션 디자이너들을 후원한 단체보다 역사는 짧지만, LVMH 그룹이 고급 기성복 업계와 패션계에 끼치는 영향력을 생각하면 파급력은 가장 폭넓다. 올해 수상자는 오는 6월 6일, 루이비통 재단에서 발표한다.


인터내셔널 울마크 프라이즈도 호주 울마크 재단이 선정하는 세계적인 패션 시상식이다. 남성복 디자이너 브랜드 ‘문수권’과 여성복 브랜드 ‘제이 쿠’가 2015년 아시아 지역 남성복과 여성복 부문을 최종 수상했고, ‘문수권’은 이듬해 피렌체 피티 워모에서 열린 2015-2016년도 울마크 프라이즈 컬렉션 본선 무대에서 런웨이 컬렉션을 선보이기도 했다.


‘LVMH 프라이즈 2018’ 파이널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황경록 ‘로크’ 디자이너


지원사업 ‘절대량’은 늘었지만
패션 지원 정책 범위를 생산 전반으로 넓히면, 사실 ‘디자이너’ 지원 산업 이상으로 크게 넓어진다. 서울시를 비롯한 경기도와 대구광역시 등 섬유·패션 산업을 주요 경제·문화 산업으로 인식한 지방자치단체들은 이미 수많은 관련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그중에는 위에 언급한 공간 지원 및 실비 지원부터 공장과 생산, 판매와 유통 정책 등 다양한 지원 사업이 벌어진다. 한국에서 매년 발표하는 패션 관련 정책을 살피면, 그 ‘절대량’만큼은 다른 나라에 뒤지지 않는다(실제로 필자 역시 다수의 패션 지원 정책 심사에 참여했다). 다만, 각 지원 사업에는 항상 조금씩 아쉬운 점이 눈에 띄었다.


가령, 지원 사업 참여 업체 중에는 대기업과 공기업을 상대로 한 경험은 많지만, 신진 디자이너들에게 필요한 인프라 작업과 소규모 비즈니스 전문가들이 부족한 경우도 보았다. 성공 가능한 브랜드에 ‘선택과 집중’하기보다, 세금이 들어가는 사업 특유의 민주적인 ‘다수 지원’ 방침을 고수, 결과적으로 유의미한 결과에 이르지 못한 경우도 봤다. 자원은 언제나 한정되어 있다. 각 지자체와 유관 단체들은 엇비슷한 정책과 중복 투자에 가까운 지원을 남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특히 직접 심사 과정에 관여한 극소수를 제외하면, 이미 국내 패션 업계에서 큰 경력을 쌓고, 경험을 후배에게 공유할 수 있는 이들과의 ‘연결 고리’는 없는 편이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지원 정책이 현존하는 것은 이제 막 패션 브랜드를 준비하는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분명히 이로운 일이다. 하지만 각 지원 정책 실행 기업과 단체들이 그 ‘과정’과 ‘이후’를 꼼꼼하게 들여다볼 책임 또한 존재한다. 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각 기업과 단체의 책임이지만, 패션계 전체의 다음 세대와 미래를 떠올리면 이미 혜택을 누린 선배들의 관심과 참여, 더불어 그 접점을 바탕으로 더 나은 정책을 만드는 실무자들의 역할 또한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