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품의 강력한 라이벌은 ‘익숙한 옷’

2026-10-19 이정준 대표 brpc@brepeace.com

이정준의 제3세대 유통트렌드 24

옷장이 가득 찬 시대, 소비자가 기억하는 건 히트상품이 아닌 스테디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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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의 옷장은 이미 가득 차 있다.



“옷은 많은데 입을 옷이 없다.”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법한 말이다. 소비자의 옷장은 이미 충분히 채워져 있다. 티셔츠도 있고, 셔츠도 있고, 팬츠도 있다. 비슷한 검은색 바지가 몇 벌씩 있는 사람도 흔하다. 그런데도 소비자는 계속 옷을 산다. 패션 비즈니스는 바로 이 모순 위에서 움직인다.


과거에는 없는 것을 채우는 것이 소비의 중요한 이유였다면, 지금은 다르다. 대부분의 소비자에게 옷은 부족해서 사는 상품이 아니다. 이미 가지고 있지만 더 마음에 드는 것, 더 편한 것, 지금의 취향에 더 잘 맞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산다.


그렇다면 브랜드의 경쟁 상대도 달라진다. 옆 브랜드의 신상품만이 아니다. 이미 소비자의 옷장 안에 들어가 있는 옷들과 경쟁해야 한다. 신상품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늘 입던 옷’이다.


패션 브랜드는 매 시즌 새로운 상품을 만든다. 새로운 소재를 찾고, 컬러를 정하고, 디자인을 개발한다. 촬영을 하고 콘텐츠를 만들고 광고비를 투입해 소비자에게 신상품을 보여준다.


하지만 구매 이후에는 조금 다른 게임이 시작된다. 소비자가 그 옷을 얼마나 자주 꺼내 입느냐는 문제다. 여기서 브랜드가 놓치기 쉬운 부분은 판매량과 착용량은 같지 않다는 것이다.


잘 팔린 상품이라고 반드시 자주 입는 상품은 아니다. 반대로 처음에는 크게 주목받지 않았던 상품이 소비자의 옷장에서는 가장 자주 입는 옷이 되기도 한다.


패션업계에서는 판매율, 소진율, 객단가, 전환율, ROAS 같은 수많은 숫자를 바탕으로 다음 상품과 마케팅을 결정한다.


그런데 정작 알기 어려운 것이 하나 있다. 고객이 우리가 판매한 옷을 몇 번이나 입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온라인에서는 구매 버튼을 누르는 순간 하나의 전환이 완료된다. 하지만 브랜드와 고객의 관계는 오히려 그때부터 시작된다. 한 번 입고 옷장에 들어간 옷과 일주일에 두세 번씩 손이 가는 옷은, 매출로는 똑같은 1건이지만 브랜드 입장에서는 전혀 다른 상품이다.


히트상품보다 중요한 것은 ‘스테디셀러’


패션 브랜드를 운영하다 보면 신상품에 대한 유혹이 크다. 새로운 디자인은 콘텐츠를 만들기 쉽고 광고 소재로 활용하기도 좋다. 유통사와 바이어에게 보여줄 새로운 이야기도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음 히트상품을 찾는다. 하지만 히트상품과 스테디셀러는 조금 다르다.


히트상품이 특정 시즌이나 짧은 기간에 강하게 팔리는 상품이라면, 스테디셀러는 시간이 지나도 고객이 계속 찾는 상품이다. 그리고 스테디셀러가 오랫동안 브랜드와 함께 성장하면 어느 순간 단순히 잘 팔리는 상품을 넘어 그 브랜드를 떠올리게 만드는 ‘시그니처 아이템’이 된다.


히트상품→스테디셀러→시그니처 아이템이 되는 과정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브랜드가 하나의 상품을 오래 끌고 가면서 핏을 개선하고, 소재를 발전시키고, 컬러를 확장하고, 고객의 피드백을 다시 제품에 반영한다.


소비자도 이 과정에 참여한다. 처음에는 한 컬러를 구매했다가 다른 컬러를 사고, 같은 상품을 다시 구매하고, 다음 시즌에도 비슷한 제품을 찾는다. 이때 상품은 단순한 SKU 하나가 아니라 브랜드와 고객을 연결하는 자산이 된다.


SKU를 늘리는 것이 정말 성장일까


매출을 늘리기 위해 반드시 상품을 더 많이 만들어야 할까. SKU를 늘리면 보여줄 것은 많아지지만, 생산 수량은 분산되고 재고·촬영·상세페이지·광고 소재·물류까지 관리할 것도 늘어난다. 특히 규모가 크지 않은 브랜드라면 SKU 증가는 생각보다 큰 비용과 재고 부담으로 돌아온다.


반대로 이미 고객이 반복해서 구매하는 상품을 발견했다면 그 상품을 더 깊게 가져가는 방법도 있다. 컬러를 확장하고, 소재를 개선하고, 사이즈를 보완하고, 고객 불편 사항을 계속 수정하는 것이다. 매 시즌 전혀 다른 상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잘 팔리는 상품을 오래 팔리는 상품으로 만드는 전략이다.


패션에서 새로움은 분명 중요하다. 하지만 새로움과 상품 수는 같은 말이 아니다. 브랜드의 힘은 상품이 얼마나 많은가보다, 이름을 들었을 때 바로 떠오르는 상품이 있는가에서 나올 수도 있다.


시그니처 아이템은 브랜드의 가장 강력한 광고


시그니처 아이템이 중요한 이유는 매출만이 아니다. 소비자는 브랜드의 모든 상품을 기억하지 않는다. 수십 개, 수백 개의 SKU가 있어도 실제로 기억하는 것은 몇 가지뿐이다.


어떤 브랜드는 특정 가방이 떠오르고, 어떤 브랜드는 특정 신발이나 재킷이 떠오른다. 그것이 오랜 시간 반복되면서 브랜드의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브랜드 입장에서도 장점이 있다. 생산 경험이 쌓이고 수요 예측이 쉬워진다. 고객 리뷰가 쌓이고 검색 데이터가 축적된다. 광고 역시 이미 검증된 상품을 중심으로 운영할 수 있다. 무엇보다 신규 고객을 설득하기 쉬워진다.


"이 브랜드에서는 이것부터 사보세요." 이 한마디가 가능한 브랜드는 강하다. 수많은 상품 가운데 무엇을 사야 할지 소비자가 고민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시그니처 아이템은 단순한 베스트 상품이 아니다. 브랜드를 가장 짧게 설명할 수 있는 상품이다.


재구매는 마케팅팀만의 숫자가 아니다


CRM도 같은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많은 브랜드가 첫 구매를 만들기 위해 광고비를 쓰고 신규회원 할인, 쿠폰, 무료배송 같은 혜택을 제공한다. 하지만 고객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면 브랜드는 계속 새 고객을 광고로 데려와야 한다.


반대로 첫 번째로 구매한 옷이 마음에 들어 자주 입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지난번에 산 바지가 좋았으니 이번에도 한번 볼까.’ 이 생각이 만들어지는 순간 다음 매출로 이어진다.


따라서 재구매율은 CRM팀이나 마케팅팀만의 숫자가 아니다. 상품기획, 디자인, 생산, 품질관리, 배송과 CS까지 브랜드 전체가 함께 만들어내는 결과에 가깝다. 아무리 정교한 CRM을 설계해도 첫 번째 상품에 만족하지 못한 고객을 다시 불러오기는 어렵다. 결국 가장 강력한 CRM은 지난번에 산 옷이 좋았던 경험이다.


소비자의 옷장이 브랜드의 진짜 경쟁시장


앞으로 패션 시장에서 경쟁은 더 치열해질 것이다. 새로운 브랜드는 계속 등장하고 해외 브랜드를 구매하기도 쉬워졌다. 소비자가 하루에 접하는 상품 수도 늘었다. 단순히 더 많은 상품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차별화하기는 어려워진다.


그래서 브랜드가 던져야 할 질문도 조금 달라져야 한다. ‘이번 시즌 무엇을 새로 만들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지난 시즌 고객이 가장 많이 입은 옷은 무엇이었을까?’


정확하게 측정하기 어렵지만 재구매율, 동일 상품의 컬러별 반복 구매, 리뷰, 반품 사유, 고객 문의, 판매 지속기간 등을 보면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그 단서 속에 다음 시즌의 상품기획이 있을 수 있다.


모든 신상품이 히트상품이 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모든 히트상품이 시그니처 아이템이 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히트한 상품 가운데 오래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는 상품을 발견하고, 그것을 스테디셀러로 키워내는 능력이다. 그렇게 몇 시즌을 살아남은 상품이 결국 브랜드의 시그니처가 된다.


소비자의 옷장은 이미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앞으로 패션 브랜드가 해야 할 일은 그 옷장에 옷 하나를 더 밀어 넣는 것이 아니다. 수십 벌의 옷 가운데 내일 아침 고객이
다시 꺼내 입을 한 벌을 만드는 것. 그리고 그 한 벌이 다시 구매로 이어지고, 시간이 지나 브랜드를 대표하는 한 벌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 패션 비즈니스에서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신상품이 아니라, 오??팔리고, 자주 입혀지고, 결국 브랜드의 이름이 되는 한 가지 상품을 만드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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