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매장, ‘웰니스 리빙랩’으로 거듭나다

2026-08-20 정의정 회장 dorrit@naver.com

정의정의 웰니스 인사이트 포커스 11

단순 쇼핑 넘어 고객의 삶을 함께 실험하는 새로운 공간으로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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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과 플래그십 스토어는 오랫동안 소비자가 완벽한 상품을 구매하고 도취감을 느끼도록 설계된 거대한 성전이었다.



패션 매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주치는 것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각 잡힌 마네킹과 흠 하나 없는 조명이다. 백화점과 플래그십 스토어는 오랫동안 소비자가 완벽하게 연출된 상품을 보고 구매 욕구를 느끼도록 설계된 공간이었다. 신상품은 가장 빛나는 자리에 놓이고, 거울과 조명은 상품과 고객을 가장 매력적으로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지난 칼럼에서는 브랜드가 스스로 만든 완벽한 이미지에 갇힐 때 고객의 삶과 멀어진다는 점을 짚었다. 이 완벽주의는 브랜드의 언어와 철학에만 머물지 않는다. 고객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물리적 공간, 즉 매장에도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더 화려한 디스플레이, 더 매끈한 동선, 더 반짝이는 진열 등 매장은 여전히 완벽함을 연기하는 무대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요즘 소비자는 완벽하게 연출된 옷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자신의 불완전함, 피로, 단절을 위로받고 온전함을 회복할 수 있는 공간을 찾는다.


그렇다면 패션 브랜드의 오프라인 공간은 앞으로 무엇을 향해야 할까. 답은 매장을 단순한 ‘판매 거점’에서 고객의 삶을 이해하고 더 나은 경험을 함께 만들어가는 ‘웰니스 리빙랩(Wellness Living Lab)’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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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은 ‘쇼핑’이 아닌 ‘경험’의 공간이다.



소비자는 ‘사는 공간’보다 ‘경험하는 공간’을 원한다


소비가 상품 중심에서 경험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오프라인 매장의 역할도 달라지고 있다. 특히 백화점과 복합쇼핑몰은 쇼핑뿐 아니라 식음료, 문화, 전시, 엔터테인먼트 등을 결합하며 소비자가 오래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다.


최근 리테일 업계 분석에 따르면 소비자들은 비필수재 구입을 줄이면서도 상품보다 경험 중심의 서비스 지출은 늘리는 경향을 뚜렷이 보인다. 백화점들이 앞다퉈 복합몰 형태로 전환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현대백화점은 문화·경험 요소를 강화한 복합쇼핑몰을 잇달아 열고 있고, 롯데백화점은 2030년까지 7조 원을 투자해 체험 중심의 복합몰을 확대할 계획이다.


패션 업계에서 이 흐름은 ‘쇼룸투어’라는 새로운 소비 행태로 나타난다. 소비자들은 한남동, 성수동, 홍대처럼 브랜드가 밀집한 지역을 찾아 여러 매장을 직접 경험하고, 매장 방문 자체를 하나의 콘텐츠처럼 즐긴다.


핵심은 그 경험이 무엇으로 채워지느냐다. 화려한 포토존과 인증샷을 위한 공간만으로는 차별화하기 어렵다. 소비자가 시간을 들여 찾아온 만큼 자신의 일상과 연결되는 경험을 제공해야 한다.


즉 패션 매장은 새로운 역할을 ‘리빙랩’에서 찾아야 한다. 리빙랩은 사회 문제나 새로운 기술을 실제 생활환경에서 실험하고 해결책을 만들어가는 공간을 뜻한다. 이를 패션 매장에 적용한다면, 매장은 옷을 입어보고 결제하는 곳을 넘어 고객이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점검하고 브랜드와 함께 더 나은 생활 방식을 경험하는 공간이 될 수 있다.


단순히 시즌 트렌드와 상품의 소재, 디자인을 설명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고객의 몸과 생활, 휴식과 활동에 필요한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매장 안에서 운동하고, 쉬고, 상담받고, 새로운 루틴을 경험하는 식이다. 상품은 그 경험을 완성하는 하나의 매개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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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이 웰니스를 위한 공간, 나이키 서울 ‘허들’



이미 시작된 ‘공간의 변화’


이러한 변화는 글로벌 브랜드와 뷰티 업계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다.


나이키가 선보인 ‘나이키 서울’이 대표적 사례다. 나이키의 라이즈(Rise) 콘셉트를 적용한 이 매장은 단순히 제품을 진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역의 스포츠 문화와 소비자의 활동을 연결하는 공간으로 설계됐다. 서울의 지역성과 스포츠 경험을 결합하고, 소비자가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과 공간을 운영한다.


특히 매장 안에 마련된 ‘허들(Huddle)’은 제품 판매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휴식과 커뮤니티 경험까지 매장의 역할로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소비자는 이곳에서 상품을 구매하는 것뿐 아니라 자신의 몸과 활동을 돌아보고 다른 사람들과 스포츠 경험을 공유할 수 있다. 매장이 판매의 거점에서 도시와 사람을 연결하는 공간으로 확장된 사례다.


뷰티 업계에서는 이 실험이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아모레퍼시픽이 용산 본사를 재단장해 연 플래그십 ‘아모레용산’은 매장을 진단과 처방의 공간으로 바꿔놓았다. 고객은 이곳에서 AI 기반 피부 분석을 통해 현재 상태는 물론 생활 습관에 따른 미래의 피부 변화까지 확인하고, ‘아모레 비스포크’ 서비스를 통해 자신의 피부 특성과 취향에 맞는 화장품을 그 자리에서 즉석 제작한다. 진열된 완제품을 파는 대신, 고객 각자의 불완전함과 고유함을 데이터로 마주하게 하고 그에 맞는 답을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술 자체가 아니다. 매장이 완성된 상품을 보여주는 공간에서 고객의 상태를 이해하고 그에 맞는 답을 제안하는 공간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패션 역시 이 관점을 가져올 필요가 있다. 옷은 단순히 몸을 감싸는 완제품이 아니라 현대인의 생활을 지탱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출근과 운동, 여행과 휴식 등 하루의 다양한 장면을 연결하고, 편안함과 활동성을 높이는 웰니스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매장은 그 가치를 가장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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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레퍼시픽이 용산 본사에 재단장해 연 플래그십 '아모레용산'은 매장을 진단과 처방의 공간으로 바꿔놓았다.



‘완벽한 쇼룸’에서 ‘온전함의 공간’으로


물론 매장 전체를 하루아침에 리빙랩으로 바꿀 수는 없다. 진단 도구를 들이는 일, 직원을 새로운 방식으로 훈련하는 일, 판매 공간의 일부를 회복의 공간으로 내어주는 결단까지 단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하지만 시작은 거창한 시설이 아니라 매장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러닝 브랜드라면 러닝화를 진열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고객의 러닝 루틴을 상담하고 지역 러닝 코스를 제안할 수 있다. 요가웨어 브랜드라면 제품을 판매하는 공간에서 짧은 호흡과 스트레칭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다. 아웃도어 브랜드라면 장비를 보여주는 것을 넘어 도심 속에서 자연을 즐기는 방법과 여행, 휴식에 관한 콘텐츠를 제공할 수 있다. 구체적인 로드맵은 다음 회차에서, 이미 이 길을 걸은 브랜드들의 사례를 통해 자세히 풀어본다.


우리가 쫓아왔던 패션의 속도와 완벽함은 결국 사람을 지치게 만들었다. 이제는 반대의 역할도 필요하다. 매장에 들어온 고객이 잠시 속도를 늦추고, 자신의 몸과 취향을 돌아보고, 일상에 필요한 새로운 경험을 얻어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완벽한 쇼룸은 끝나고 있다. 앞으로의 매장은 완벽한 상품을 보여주는 무대가 아니라, 고객의 불완전한 일상을 이해하고 더 나은 삶의 방식을 함께 실험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쇼룸투어에 나선 소비자가 진짜 찾는 것도 결국 이런 경험일지 모른다. 화려하게 연출된 공간보다 자신의 삶에 닿는 경험, 사진으로 남기는 공간보다 기억에 남는 경험이다.


패션 브랜드가 고객의 온전한 삶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기 시작할 때 매장의 역할도 판매를 위한 공간에서 머물고, 경험하고, 회복하는 공간으로 달라진다. 패션 매장의 다음 경쟁력은 더 많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고객의 삶에 더 깊이 들어가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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