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20 김해숙 대표 lemerskim@gmail.com
김해숙의 파리지엔 패션 살롱 02
홀리데이 시즌 드레스 코드는 자기 서사를 완성하는 언어
12월의 공기는 특별하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사람들의 발걸음은 어느새 조금 더 가벼워지고, 도시의 빛은 스스로 온도를 높인다. 환하게 장식된 가로수, 건물 외벽을 감싸는 미디어 파사드,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치장한 호텔 로비….
우리가 사는 도시는 마치 한 순간에 무대 의상을 갈아입은 듯 화려하게 반짝인다. 12월은 그렇게 한 해의 마지막을 패션의 언어로 정리하는 계절이다.
해마다 찾아오는 이 계절이 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같은 질문을 꺼낸다. “올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파티에서 나는 어떤 모습이고 싶은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 우리가 파티에서 선택하는 옷, 컬러, 디테일, 액세서리는 개인의 취향을 넘어 올해의 감정, 내가 지나온 시간, 앞으로의 태도 까지를 모두 담아내는 하나의 ‘언어’로 각인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티의 드레스 코드는 단순한 규칙에 그치지 않고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이며 그 자체가 하나의 축복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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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사람들에게 파티는 한 해를 보내는 방식을 담은 일종의 정제된 축제다. |
드레스 코드, 감정을 맞추는 일
파티의 드레스 코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는다면, 그것은 단순히 옷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맞추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파티 문화의 기원은 오래되었다. 사냥이 끝난 후 잡은 음식을 나누며 함께 먹고 축하하던 자리에서 비롯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제 파티는 한 해를 정리하고, 사람들과 감정을 나누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작은 의식에 가깝다.
그렇다면 파티의 드레스 코드는 왜 중요할까?
드레스 코드는 ‘함께 어울리는 이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초대장’과 같다. 참석자들이 같은 무드, 같은 리듬을 공유하게 만드는 비밀스러운 장치다. 공유하는 자리의 세계관을 통일시켜주는 시각적 합의이며, 어떤 경우에는 단 하나의 ‘브로치’로도 그 합의에 동참할 수 있다.
이처럼 드레스 코드는 엄격한 규칙이 아니다. 오히려 파티라는 분위기를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문학적 장치에 가깝다.
따라서 드레스 코드는 무작정 타인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의 ‘나’를 가장 잘 증폭시킬 수 있는 방식으로 표현돼야 한다.
그런 면에서 파티에서의 패션은 ‘변장’이 아니라 ‘확장’이다. 일상에서는 드러내지 못했던 자신의 또 다른 측면을 패션이라는 도구를 통해 무대 위로 불러낼 수 있는 또 다른 표현 방식이다.
빛이 만든 무대, 그 위를 걷는 사람들
나는 12월이 되면 늘 파리의 샹젤리제가 떠오른다. 파리 유학시절, 외로움과 설렘이 뒤섞여 있던 겨울 밤. 친구들과 걸었던 그 빛의 거리, 들려오던 길거리 뮤지션의 샹송, 지나가던 사람들이 서로 건네던 “Bonne Annee(본안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그 시절의 샹젤리제는 겨울이 되면 도시 전체가 하나의 패션쇼 런웨이로 변했다. 어쩌면 파리의 겨울 조명은 도시를 위한 장식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조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올해 샹젤리제의 조명은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2km에 걸친 LED 조명은 에너지 효율과 지속가능성을 고려해 설계되었고, 음악에 반응하며 색과 패턴을 바꾸는 요술을 부린다. 클래식부터 일렉트로닉까지, 소리의 결에 따라 조명이 흔들린다. 빛이 '경관'에서 '경험'으로 이동한 셈이다.
이같은 변화는 패션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컬러는 유행의 선택지가 아니라 정서와 감정을 반영하는 '심리적 언어'로 진화한다.
파스텔 블루의 고요함, 체리 레드의 생동감, 로즈 골드의 은은한 우아함까지. 색은 감정의 언어가 되고 실루엣은 태도를 반영한다. 여기서 우리는 옷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가 세상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선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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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는 도시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갤러리로 재구성한다. |
서울, 그 안에서 빛나는 법
이에 반해 한국의 12월은 빠르다. 대형 백화점 외벽은 초대형 미디어 파사드로 변모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이미지가 교체되며, 그 어떤 도시보다 시각적 스토리텔링이 화려하게 펼쳐진다.
그래서 서울의 조명은 파리보다 조금 더 직접적이고, 조금 더 화려하며, 조금 더 도시적이다. 그 속에서 연말을 보내는 크고 작은 파티는 나에게 주는 보너스 같은 시간이 된다.
즐겁고도 피곤한 시즌이지만 내심 기대가 된다. 파티는 결국 나를 위한 무대이기 때문이다. 그 순간을 위해 선택한 옷은 한 해의 나를 정리하는 언어가 된다.
그래서 나는 하나의 기준을 세웠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가장 나다운 나로 빛나자.’ 이는 곧 스스로에게 가장 솔직하게 서는 방법이다.
피에로 파티가 보여준 드레스 코드의 힘
기억에 남는 드레스 코드가 있다.
지난해 디자이너 선생님들과 함께한 그룹 연말 파티의 드레스 코드는 ‘피에로’였다. 패턴은 도트, 메인 컬러는 블랙ㆍ레드ㆍ화이트로 정했다. 하지만 피에로 컨셉을 어떻게 파티복으로 보여줄 것인가를 놓고 며칠을 고민했다.
결국 선택한 옷은 붉은 레드 바탕에 검은색 도트가 들어간, 소매의 실루엣이 아주 풍성한 실크 타이 블라우스였다. 머리에는 피에로 헤어 밴드를 더했다.
블라우스의 풍성한 볼륨은 피에로의 과장된 연극성을 드러내면서도, 실크 소재가 주는 우아함이 균형을 잡아주도록 꾸몄다. 나는 슬픔을 감추고 웃음을 선사하는 피에로의 이중성을, 화려함과 절제 사이에서 표현하고 싶었다.
이날 파티장 입구에는 그룹에서 준비한 다양한 소품들이 준비돼 있었다. 도트 스카프, 붉은 깃털 장식의 브로치, 피에로의 망사 케이프 등.
드레스 코드를 미처 준비하지 못한 초대 손님들을 위한 작은 배려였다. 그 배려는 하나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분위기를 만든다’
이처럼 드레스 코드는 모임의 결을 완성하는 공동 창작이다. 단 하나의 브로치를 꽂았더라도 그 자리를 존중하고 그 모임 안으로 스며들겠다는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이 된다. 그 날 파티는 패션의 힘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는 계기였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피에로를 해석했고, 그 해석들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완결체 무대를 완성했다.
파티는 패션이다
파티는 짧지만 그 순간을 위해 고른 옷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어떤 옷을 입었는지, 어떤 색을 선택했는지는 비록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아도 그 날의 감정과 태도는 오래도록 가슴 속에 맴돈다.
결국 패션은 나의 이야기, 나의 감정, 나의 태도, 나의 시간을 한 벌의 옷으로 기록하는 작업이다. 12월이 되면 나는 늘 그렇듯 가장 반짝반짝 빛나는 별로 재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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