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05 오서희 대표 montemilano@naver.com
오서희의 K패션, 세계를 입히다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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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근 대표가 경은산업 염색가공 공장을 보여주고 있다. |
부산의 산업지대 한복판, 2025년 8월 말의 한여름 끝자락에 나는 경은산업의 공장을 직접 찾았다.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섬유 원단의 은은한 냄새가 공기 속에 스며 있었다. 발걸음을 옮기자 커다란 가공기계들이 일정한 리듬을 두드리며 돌아가고 있었고, 수많은 원단들이 그 속을 통과하며 색과 질감을 달리해 갔다.
기계음은 크고 거칠었지만, 그 속에서 수십 년간 이어져 온 기술과 경험의 흔적을 읽을 수 있었다. 이곳은 제조업 현장이 아니라, 부산 섬유 산업의 맥박이 뛰고 있는 살아있는 공간이었다.
장인정신이 살아 숨 쉬는 현장
경은산업은 직물을 염색하고 가공하는 공장이 아니었다. 현장에서 만난 직원들의 손길에는 숙련된 장인의 감각이 담겨 있었고, 원단을 손끝으로 훑어보는 짧은 동작에도 수십 년의 노하우가 배어 있었다. 이곳은 자동차 시트용 원단, 인테리어 소재, 패션 원단까지 다양한 영역을 다루며 그 어떤 위기에도 버텨온 '작지만 강한 기업'의 실체였다.
실제로 이 회사는 2024년 '섬유의 날'에서 산업포장을 수상하며 부산 섬유 산업의 자존심을 지켜낸 바 있다. 상을 받은 이유는 매출 때문이 아니라, 기술을 고집하고 관계를 지켜낸 태도 때문이라는 생각이 현장을 둘러보며 더 강하게 다가왔다.
의사이자 기업인으로서의 리더십
그 중심에는 이성근 대표가 있다. 그는 공장에서 생산의 맥박을 살피다가도, 병원에서는 흰 가운을 입고 환자들을 돌보는 또 다른 얼굴을 가진다. 부산진구 범내골역 앞에 자리한 이샘병원에서 그는 내분비·갑상선, 소화기, 건강검진을 중심으로 환자들의 일상을 지켜낸다.
진료실에서의 그의 설명은 공장에서 직원들과 나누는 대화와 닮아 있었다. 복잡한 데이터를 단순하게 풀어내고, 문제를 미리 발견해 더 큰 위기로 번지지 않게 하는 태도. 병원과 공장이라는 전혀 다른 무대 위에서 그는 같은 철학을 이어가고 있었다. 사람을 이해하고, 관계를 지키고, 지속 가능성을 만들어가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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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근 대표는 부산 이샘병원 원장이기도 하다. |
부산 섬유산업의 새로운 방향타
2024년 2월 그는 부산섬유패션산업연합회 제11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나는 그 사실을 떠올리며 공장의 기계 소리를 듣고 있었다. 산업은 혼자 설 수 없다는 것, 부산의 섬유업이 다시 살아나려면 서로의 기술과 시장을 엮어내야 한다는 메시지가 그 현장에서 더 또렷이 다가왔다.
그가 맡은 회장직은 명예직을 넘어 위기를 맞은 산업을 다시 묶어내야 하는 무거운 책임이었다. 부산의 섬유업체들은 저가 경쟁에 내몰리고, 숙련 인력의 고령화로 기술 전수가 어려워지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여기에 환경규제 강화와 ESG 경영 요구까지 더해져 변화의 압박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부산 섬유 산업의 지속 가능성과 미래 비전
나는 그날, 수많은 원단이 기계 속을 오가며 색을 입고 질감을 달리하는 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 과정은 마치 한 사람의 삶을 닮아 있었다. 거친 원단이 가공을 거쳐 부드럽고 튼튼한 옷감으로 변하듯, 이성근 대표의 길 또한 쉽지 않은 굴곡을 거쳐 지금의 단단함에 이르렀다.
병원에서 환자의 삶을 지키고, 공장에서 부산의 산업을 지키고, 연합회에서 미래를 설계하는 그의 모습은 서로 다른 장면 같지만 사실은 하나의 이야기였다. 결국 그는 사람을 중심에 두고, 관계를 지켜내며, 위기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한국 섬유산업이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저가 공세에 밀려 쇠퇴일로를 걷고 있다는 진단이 나온 지 오래다. 하지만 경은산업과 같은 기업들의 존재는 섣부른 비관론에 제동을 건다. 대량생산의 경쟁력은 잃었을지 몰라도, 기술력과 품질, 그리고 무엇보다 신뢰를 바탕으로 한 관계 중심의 경영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 중심 경영의 힘
그날 내가 공장에서 본 수많은 원단들은 산업 자재를 넘어선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것은 부산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돌아가는 심장 같은 풍경이었다. 기계음 사이로 스쳐 지나가던 직원들의 웃음, 원단을 살피는 세심한 눈빛,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든 리더의 철학이 하나의 장면으로 겹쳐졌다.
나는 공장을 나서며 확신했다. 이성근이라는 이름이 남기는 가장 큰 유산은 실적표 이전에 '사람을 믿고 지켜낸 태도'라는 것을. 그것이야말로 부산이, 그리고 우리 사회가 오래도록 필요로 하는 자산일 것이다. 급변하는 시대에 살아남는 기업의 비결은 결국 사람에게 있다는 오래된 진리를, 이곳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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