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17 오서희 대표 montemilano@naver.com
오서희의 K패션, 세계를 입히다 19
25년 경력 디자이너가 발견한 AI 모델링의 새로운 가능성
매일 아침, 작업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나는 하나의 의식을 치른다. 새로 완성된 옷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다.
예전처럼 모델을 캐스팅하거나 스튜디오를 예약할 필요는 없다. 노트북 화면 속에서 내 디자인이 살아 움직이는 마법을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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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몬테밀라노 제품을 입은 AI 모델 |
한 벌의 옷, 무한한 변신
지난주 완성한 재킷을 AI 모델에게 입혀보았다. 먼저 아프리카계 모델을 선택했다. 건강한 곱슬머리와 구릿빛 피부가 재킷의 베이지 컬러와 만나자 전혀 예상치 못한 화학반응이 일어났다. 단순한 오피스 재킷이 갑자기 아프리카 대륙의 자연스러운 우아함을 입었다. 재킷의 구조적인 라인이 모델의 당당한 어깨선과 어우러지면서 파워 슈트의 느낌까지 연출했다.
다음엔 동양인 모델로 바꿔보았다. 부드러운 얼굴선과 선명한 눈매가 같은 재킷을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바꿔놓았다. 미니멀한 세련됨이 돋보였다. 특히 재킷의 실루엣이 모델의 슬림한 체형과 조화를 이루면서 클래식한 우아함을 자아냈다. 같은 디자인이지만 마치 다른 옷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세 번째로 시도한 건 유럽계 모델. 금발에 푸른 눈동자가 재킷의 중성적 컬러와 만나 또 다른 매력을 발산했다. 이번엔 캐주얼 시크한 분위기가 강조되었다.
놀라운 건 이 모든 과정이 물리적 제약 없이 진행된다는 점이다. 조명 장비도, 메이크업 아티스트도, 심지어 실제 모델도 필요 없다. 하지만 결과물의 완성도는 웬만한 패션 화보를 능가한다. 포즈의 자연스러움, 눈빛의 생동감, 심지어 손끝의 각도까지 계산된 듯 정교하다.
25년 경력자도 놀란 기술의 진화
디자이너로 25년을 일하며 수천 장의 룩북을 만들어왔지만, 이런 방식은 처음이다. 단순한 합성 수준을 넘어선 이 기술은 옷의 실루엣, 주름의 자연스러운 흐름, 소재의 질감까지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재현한다. 울 소재의 부드러운 터치감까지 화면 너머로 전달되는 것 같다.
과거엔 신제품 하나를 촬영하려면 최소 일주일의 준비 과정이 필요했다. 스타일리스트 미팅에서 컨셉을 논의하고, 모델 캐스팅에서 브랜드 이미지에 맞는 얼굴을 찾고, 스튜디오 예약에서 원하는 분위기의 공간을 섭외하고, 촬영팀 스케줄 조율까지. 하루 종일 촬영해도 만족스러운 컷을 얻기 어려웠다. 때로는 날씨나 모델의 컨디션 같은 변수로 인해 전체 일정이 미뤄지기도 했다.
설령 촬영이 성공적으로 끝나더라도 후반 작업이 남아있었다. 보정, 색감 조정, 배경 정리까지 추가로 며칠이 더 소요되었다. 결국 하나의 완성된 이미지를 얻기 위해 2~3주의 시간과 상당한 예산이 투입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지금은 어떨까? 커피 한 잔이 식기 전에 밀라노 거리, 파리의 몽마르트르, 뉴욕의 화이트 스튜디오를 오가며 다양한 컨셉을 실험할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이다. 더 놀라운 건 배경까지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다는 점이다. 아침엔 현대적인 오피스 빌딩을, 점심엔 빈티지한 카페를, 저녁엔 미니멀한 갤러리 공간을 배경으로 설정할 수 있다.
다양성의 새로운 차원
AI 모델링이 가져온 가장 큰 변화는 '다양성의 확장'이다. 하나의 디자인을 다양한 인종, 체형, 연령대의 모델에게 입혀보며 그 옷이 가진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다. 실제로 작년에 런칭한 원피스의 경우,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체형의 모델들에게 입혀보면서 각 연령대별로 어울리는 스타일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드레스는 어떤 피부톤과 가장 잘 어울릴까?" "이 실루엣은 어떤 체형에서 가장 아름다울까?" "이 컬러는 어떤 헤어 스타일과 매치해야 할까?"
이런 질문들을 실시간으로 실험해볼 수 있다는 건 디자이너에게 엄청난 혜택이다. 과거에는 한정된 모델과 촬영 조건 때문에 확인할 수 없었던 조합들을 무한정 시도해볼 수 있다.
더 나아가 글로벌 마케팅에서도 각 지역의 특성을 반영한 맞춤형 비주얼을 빠르게 제작할 수 있다. 같은 옷이라도 아시아 시장에서는 동양인 모델로, 유럽 시장에서는 서양인 모델로, 각 지역의 미적 기준과 선호도에 맞춰 다르게 표현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모델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각 문화권의 미적 감각을 반영한 포즈, 표정, 분위기까지 조정할 수 있다는 의미다.

기술과 감각의 균형점
물론 아직 한계는 있다. 실제 모델이 입었을 때의 생생한 온도감, 자연스러운 움직임의 뉘앙스는 AI가 완전히 대체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실크 소재가 몸에 닿을 때 만들어지는 미묘한 주름의 변화나, 모델이 걸을 때 생기는 자연스러운 움직임의 아름다움은 여전히 실제 촬영에서만 포착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한계조차 빠르게 극복되고 있다.
최근에는 움직임까지 구현하는 AI 기술이 등장하고 있다. 정적인 이미지를 넘어 모델이 실제로 걸어 다니고, 포즈를 바꾸고, 표정을 짓는 영상까지 만들 수 있다. 아직은 완벽하지 않지만, 발전 속도를 보면 멀지 않은 미래에 실제 촬영과 구분하기 어려운 수준에 도달할 것 같다.
중요한 건 기술을 어떻게 활용하느냐다. 나는 AI를 맹신하지도, 거부하지도 않는다. 대신 이를 하나의 강력한 도구로 받아들이고, 그 위에서 25년간 쌓아온 미적 감각과 브랜드 철학을 펼쳐나간다. AI가 만든 결과물을 보면서 "이건 우리 브랜드의 정체성과 맞는가?" "이 표현이 고객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까?"를 끊임없이 판단한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결국 최종 결정은 사람의 감각과 경험에 달려있다.
패션의 미래를 그리다
AI 모델링은 이제 단순한 보조 수단이 아니라 필수적인 크리에이티브 툴이 되었다. 한 장의 이미지로 글로벌 캠페인을 런칭하고, 수십 가지 변형을 실시간으로 테스트할 수 있는 시대다. 실제로 우리 브랜드의 최근 캠페인은 AI로 제작한 이미지 3장으로 시작되었다. 그 이미지들이 소셜 미디어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면서, 본격적인 마케팅 전략을 수립할 수 있었다.
이는 비용 절감의 차원을 넘어선다. 과거에는 한 번 촬영하면 그 결과물로 몇 달을 버텨야 했지만, 이제는 시장의 반응을 보면서 실시간으로 비주얼을 업데이트할 수 있다. 트렌드가 바뀌면 즉시 새로운 컨셉으로 전환하고, 고객의 피드백을 받아 스타일을 조정할 수 있다.
처음엔 반신반의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게 정말 우리 고객들에게 어필할까?" "실제 모델만큼 설득력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있었다. 하지만 직접 경험해보니 확신이 든다. 이것이 패션계의 미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미 현재가 되었다. 옷만 있으면 된다. 나머지는 기술이 해결해준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방향을 잡고 감각을 입히는 일은 여전히 디자이너의 몫이다.
결국 AI는 우리의 창의성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창의성이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빠르게 실현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파트너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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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서희(Sylvia Oh)는 미국 오클라호마시티대학교와 홍익대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프랑스 브랜드 레오나드(LEONARD PARIS) 바잉팀장을 거쳐 2001년 몬테밀라노를 창업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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