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29 유재부 기자 UB@fi.co.kr
한국형 헤리티지 브랜드의 탄생 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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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변방이었던 대한민국의 K-컬처는 이제 세계가 주목하는 장르가 되었다.
영화감독 봉준호와 박찬욱, 배우 윤여정과 이정재, 축구 선수 손흥민과 이강인, K-팝 스타 BTS와 블랙핑크, <오징어 게임>과 <기생충> 등 K-컬처 고유명사는 세계인이 궁금해하고 동경하는 검색어가 되었다. 이제 K-패션도 넥스트 한류 키워드로 주목받고 있다. 그 중심에 K-패션의 젊은 붉은 전사들이 있다.
◇ 세계 컨템포러리 대중문화의 중심
콧대 높던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의 대한민국에 대한 인식이 변했다. 지난해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구찌가 경복궁에서 크루즈 패션쇼를 여는가 하면, 프랑스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이 한강 잠수교에서 개최한 런웨이는 온라인 중계를 통해 전 세계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한국 패션시장의 주목할 만한 성장 때문이다. CNBC 보도에 따르면, 2022년 한국 럭셔리 소비시장은 168억 달러(약 21조 원)로 세계 6~7위 수준이다. 1인당 명품 소비는 325달러(약 40만 원)로 미국(약 35만 원)과 중국(약 7만 원)을 제치고 세계 1위를 기록했다. 물론 한류 덕분에 서울이 트렌디한 글로벌 명소로 부상한 점도 한몫했을 터이다. “한국은 문화적인 시대정신을 대표한다”라는 테드 서랜도스 넷플릭스 CEO의 말처럼, 이제 한국은 한류 바람을 타고 자타공인 글로벌 컨템포러리 대중문화의 중심에 서있다.
세계로 향하는 한류 진격에는 K-패션도 예외는 아니다. K-팝, K-드라마, K-무비, K-뷰티, K-푸드 등 한류 콘텐츠의 성공으로 한국 문화에 대한 글로벌 관심이 높아졌고 이는 자연스럽게 K-패션으로 이동하고 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과 BTS의 ‘러브 유어셀프’ 같은 히트곡과 영화 ‘기생충’과 드라마 ‘오징어 게임’ 그리고 K-푸드인 ‘비빔밥’과 ‘김밥’, ‘떡볶이’와 같은 K-콘텐츠는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데 이바지했다. 이러한 K-콘텐츠의 성공은 한국 문화에 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패션산업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제 K-패션의 남은 과제는 루이비통, 구찌, 버버리, 랄프 로렌과 같은 한국형 헤리티지 브랜드의 탄생이다.
현재 우영미, 준지, 젠틀몬스터, 마르디 메크르디 등 수많은 K-패션 브랜드가 국내외에서 활약하고 있다. 여기에 K-패션이 도약할 환경도 무르익었다. 한국은 세계가 인정한 손재주와 기술, 동대문이라는 생산 인프라, IT 기반, 트렌디한 소비층을 갖추었고 한류 열풍을 타고 한국적인 것에 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우리만의 K-패션 스토리와 디자인, 유니크한 정체성을 담은 K-패션 헤리티지 브랜드의 탄생은 이제 꿈이 아닌 현실로 승화시켜야 한다.
◇ K-패션, 역사가 되다
사실 K-패션이 세계 시장을 노크한 것은 오래전이다. 진태옥, 이신우, 이영희와 같은 해외 진출 1세대 디자이너 브랜드들은 1990년대 초반부터 파리와 뉴욕에서 패션쇼를 열어 K-패션을 전 세계에 알렸다. 이어 이상봉, 우영미, 손정완, 데무와 같은 2세대 디자이너 브랜드들은 프레타 포르테, 트라노이, 코트리와 같은 글로벌 패션 페어 참가해 해외 바이어를 대상으로 꾸준한 비즈니스를 진행해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했다. 이제 젊은 3세대 디자이너들이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먼저 뉴욕에서 여성복 브랜드 ‘애슐린(Ashly nn)’을 전개 중인 애슐린 박(한국명 박상연)은 2022 LVMH 프라이즈 최종 결선에 진출해 주목받았다. 그녀는 이화여대 의류직물학과를 졸업한 후 도쿄 모드에서 패션 기술 고급과정을 이수하고, 일본 분카 패션 대학에서 패션 크리에이션 과정 석사 학위를 획득했다. 2009년 일본 요지 야마모토에서 남성복 디자이너, 2012~2015년까지 알렉산더 왕에서 여성복 디자이너로 근무했다.
캘빈 클라인에서 라프 시몬스와 함께 일한 애슐린 박은 2021년 뉴욕에서 자신의 이름 딴 브랜드를 런칭했다. 그녀는 의류 생산과정에서 폐기물과 환경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하는 지속 가능한 패션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세계 패션계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서울, 도쿄, 파리, 뉴욕을 넘나들며 패션을 공부하며 경험한 각기 다른 문화를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비전을 형성한 애슐린 박의 디자인은 독보적인 테일러링, 오트 쿠튀르의 드레이핑 기술, 섬세한 장인정신을 절제미 있는 패션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그녀의 행보는 K-패션이 주목해야 할 ‘지속가능한’ 패션과 일맥상통한다.
또 다른 뉴욕커 패션 디자이너 장문정은 브랜드 ‘문챙(MOON CHANG)’으로 꼼데가르송과 메종 마르지엘라의 뒤를 이을 새로운 미학의 디자이너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뉴욕 프랫대학과 FIT를 수석 졸업한 그녀는 뉴욕 패션위크에서 컬렉션을 발표할 때마다 주목받고 있다. 그녀는 이탈리아 ‘A 디자인 어워드’에서 금상을 수상하는 등 수많은 국제 디자인 대회에서 수상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기묘한 이야기’의 세이디 싱크, ‘가십걸’의 테일러 맘슨 등 수많은 배우와 가수들이 주요 고객인 그녀는 처음 디자인부터 생산과정을 거쳐 세상에 제품을 선보이기까지 일관된 윤리적인 접근을 추구하며, 인간과 동물의 공존, 인간과 자연의 상생을 위한 노력에서 나오는 지속 가능하고 아름다운 브랜드를 만드는 것을 패션 철학으로 삼고 있다.
한국인 최초로 ‘2013 H&M 디자인 어워드’ 대상을 받은 ‘민주킴(MinjuKim)’의 디자이너 김민주는 넷플릭스의 글로벌 디자이너 발굴 경연 시리즈 <넥스트인패션> 시즌 1에서 매회 러블리하면서 감각적인 컬러의 디자인으로 시선을 사로잡더니 결국 초대 우승자라는 타이틀을 거머쥐며 우승 상금 3억 원과 럭셔리 이커머스 플랫폼 네타포르테 입점 기회를 얻었다. BTS의 월드 투어 의상을 제작한 바 있는 김민주는 특유의 유쾌하고 즐거운 감각으로 꾸뛰르 디자인을 선보이며 세계 패션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2016년 런던에서 여성복 ‘록(ROKH)’을 런칭한 디자이너 황록은 이듬해인 2016년 런던패션위크에서 주목할 만한 신인 디자이너로 인정받았다. 런던 센트럴 세인트 마틴 출신으로 끌로에, 루이비통, 피비 파일로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재임 중이던 셀린느에서 쌓은 경험으로 그만의 유려한 디자인을 선보이고 있다. 2018년에 한국인 최초로 LVMH 프라이즈 파이널 리스트에 선정돼 특별상을 받기도 했으며, 이어 파리패션위크 2019 가을/겨울 컬렉션 오프닝 무대를 장식하기도 했다. 현재 브랜드 록은 전 세계 100여 곳이 넘는 매장에서 판매되는 히트 브랜드로 ‘폭풍 성장’했다.
2021년 브랜드 지용킴(JiyongKim)을 런칭한 디자이너 김지용은 시간과 자연이 만들어내는 지속 가능한 가치를 품은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주목받고 있다. 일본 문화복장학원을 거쳐, 영국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서 남성복을 전공한 김지용은 버려진 원단이나 제품에 선 블리치 기법으로 새 생명과 이미지를 불어넣는 작업으로 유명하다. 업사이클링 수준을 넘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아이템을 만들어내는 테크니컬한 방식으로 주목받고 있다. 현재 도버스트리트마켓, 미스터 포터, 브라운스, 지알에이트, 10 꼬르소 꼬모 서울 등의 편집숍에 입점돼 있다.
디자이너 표지영이 전개하는 브랜드 ‘레지나 표(Rejina Pyo)’도 2019년 런던 패션 어워즈에서 여성복 부문 올해의 신인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았다. 특히 이듬해 영국의 왕세손비 메건 마클이 들었던 한국의 전통 보자기를 닮은 ‘레지나 표’ 클러치 백 덕분에 그녀는 세계 패션계에 얼굴을 알렸다. 지난해 2월 돌체앤가바나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밀라노패션위크 기간 동안 패션쇼를 선보인 오트 쿠튀르 브랜드 ‘미스 소희(Miss Sohee)’의 디자이너 박소희도 파리 오트 쿠튀르 컬렉션에 성공적으로 데뷔했다. 스물여덟 살 젊은 한국인 디자이너가 하우스 브랜드의 자본으로도 이루기 어려운 일을 해낸 것이다.
◇ 세계가 먼저 알아본 국내파 디자이너
젊은 국내파 디자이너들 역시 세계 패션의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해 서울패션위크의 오프닝 무대를 장식한 ‘얼킨(ul:kin)’의 디자이너 김성동은 브랜드 고유의 감성과 미학을 토대로 최대 화두인 지속 가능한 패션을 실천하고 있다. 덕분에 예술과 업사이클링, 해체주의와 재구성, 하이브리드한 감성을 기반으로 다양한 사회적 이슈를 주제로 한 컬렉션은 많은 해외 바이어의 주목 대상이다.
K-팝 스타들이 사랑하는 브랜드 ‘비엘알블러(BLR BLUER)’의 디자이너 권봉석은 짜임이 굵은 데님 소재를 메인 원단으로 사용해 거칠고 남성적인 실루엣의 청키한 분위기로 인기를 얻고 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아웃사이더를 대변하며 아시아의 서브컬처를 스트리트 웨어로 표현하는 브랜드 ‘아조바이아조(AJOBYAJO)’의 디자이너 김세형도 특유의 무드로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부부 디자이너 최경호, 송현희가 이끄는 ‘홀리넘버세븐(HOLY NUMBER 7)’은 ‘옷은 사람이 입는다’라는 패션의 본질을 바탕으로 자극적이고 퇴폐적인 문화가 하나의 패션 코드가 되어버린 시대에 브랜드만의 방식으로 위트에서 피어오르는 희망을 보여준다.
특유의 밝은 에너지와 열정 가득한 무대로 대한민국 K-패션의 매력을 전파하는 박윤희 디자이너는 자신의 브랜드 ‘그리디어스’를 ‘샤넬’과 같은 글로벌 하우스 브랜드로 키우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비욘세도 반한 K-패션 디자인’이란 타이틀로 해외 언론의 주목을 받는 그녀는 해외 유학파는 아니다. 그녀는 국내에서 패션을 전공하고 졸업 후 한섬과 오브제와 같은 국내 회사를 다니면서 차근차근 실무를 익히고 실력을 쌓았다. 이런 수련과정 끝에 ‘그리디어스’를 런칭하고 꾸준하게 해외 전시에 참가하며 지속적으로 수출시장을 개척해 가고 있다. 그녀의 성장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또한 파리패션위크 트라노이쇼에서 가장 많은 바이어가 방문한 브랜드 ‘므;아므(MMAM)’도 주목 대상이다. 박현 디자이너가 전개하는 ‘므;아므’는 클래식에 낙서 드로잉 요소를 가미한 컨템포러리 디자이너 브랜드다. 2023 S/S 파리패션위크 공식 사이트에 게재된, 트라노이쇼를 대표하는 브랜드 콘텐츠에도 가장 위에 이름을 올렸다. 총 4개의 브랜드가 언급됐는데 므아므와 프랑스 브랜드 세 개였다. 이외에도 매거진 ‘마담 피가로’ 기사에 메인으로 언급되는 등 트라노이쇼를 리뷰한 해외 매거진에서 메인에 언급되며 주목을 받았다.
◇ 시간과 사람에 대한 투자 더해져야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는 한국의 골프와 양궁, 클래식의 공통점은 바로 영재 교육과 조기 교육이다. 현재 전국의 특성화 고등학교의 모델과와 패션과에서는 매년 많은 꿈나무가 배출되고 고교 패션&모델 콘테스트도 정기적으로 열린다. 이들을 잘 키운다면 K-패션의 미래는 지금보다 더 밝은 것이다. 여기에 무신사와 지그재그 같은 패션 플랫폼에서는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다양한 유통 기회를 제공하고 있으며 국내 백화점들도 수입 브랜드 편식에서 벗어나 젊은 K-패션 브랜드를 속속 입점시키고 있다.
물론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많다. 먼저 패션 저널리즘을 활성화해야 한다. 뉴욕패션이 유럽 패션과 당당히 겨룰 수 있었던 것도 미국 패션 저널의 힘이었다. 미국 출신 디자이너를 글로벌 수준으로 만든 일등 공신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고부가가치 하이-엔드 패션에 대한 국가적인 지원과 금전적인 투자를 극대화해야 한다. 이제 전시행정 차원의 보여주기식 행사가 아닌, 보다 커머셜하고 독착정인 K-패션의 대안으로 서울패션위크도 거듭나야 할 것이다.
결국 K-패션이 독창성과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시간과 사람에 대한 투자가 필수적이다. 시간과 자본 투입을 통해 브랜드 가치를 높일 수 있고 유럽과 같은 럭셔리 하우스도 만들 수 있다. 이는 K-팝을 통해 이미 증명된 한류의 성공 방정식이다. 지금처럼 매출이 최우선인 수수료 유통환경과 브랜드의 빠른 리턴을 요구하는 구조가 변하지 않는 한 K-패션의 미래는 없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K-패션의 완성은 바로 한국형 헤리티지 럭셔리 브랜드 탄생으로 마무리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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