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칼럼] K-패션에 슈링크가 없다!

2023-05-25 유재부 패션 에디터 UB@fi.co.kr

왼쪽부터 비건타이거, 얼킨, 그리디어스의 2023 가을/겨울 서울 컬랙션


2014년 개봉작 <이브 생 로랑>을 오랜만에 다시 봤다. 크리스찬 디올의 갑작스런 사망 후, 패션 천재 이브 생 로랑은 21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그를 뒤이을 수석 디자이너로 임명된다. 패션계의 모든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첫 컬렉션을 성공리에 치른 이브는 평생의 파트너가 될 피에르 베르제를 만나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이브 생 로랑에게 입영 통지서가 날아오다. 징집되기 싫어서 발버둥치던 이브 생 로랑은 평판에도 문제가 생겨 디올에서 잘리고 입대하지만 디자이너 삶에 특화되어 있던 그는 적응을 하지 못하고 정신 병동에 갇히게 된다. 그때 그를 구해준 사람이 피에르 베르제였다. 이때부터 이브 생 로랑은 피에르 베르제에게 의지하며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


의기투합한 이브 생 로랑과 피에르 베르제는 자신들만의 오트 쿠튀르를 만들기로 한다. 하지만 평판이 나쁜 이브 생 로랑에게 투자를 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 난관에 부딪힌다. 이때 피에르 베르제가 구세주로 나선다. 그는 똑똑한 사업가였다. 이브 생 로랑을 버린 디올에 소송을 걸어 거금 10만 달러의 보상금을 받아냈고 미국의 백만장자 제스 마크 로빈슨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1961년 '이브 생 로랑 쿠튀르 하우스'를 설립하고 1962년 대망의 첫 컬렉션을 개최했다.


선원들이 즐겨 입는 피 재킷과 바지, 튜닉 등을 소개한 첫 컬렉션은 큰 반향을 일으켰고, 미국 잡지 <라이프>는 “이브 생 로랑은 샤넬 이후에 최고의 슈트 메이커”라고 호평했다. 1966년 이브 생 로랑은 혁명적인 이브닝웨어 '르 스모킹'(Le Smocking)을 발표했다. 당시 여성들은 행사를 위해 화려한 드레스를 착용했는데, 그는 1930년대 여배우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남장 사진에서 영감을 받아 여성을 위한 턱시도를 새로운 이브닝웨어로 제안했다. 이후 두 사람이 만든 브랜드 YSL은 세계적인 대성공을 거두고  발표하는 컬렉션마다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발돋움한다.


 "이브, 너의 재능을 믿어"라는 영화 속 피에르 베르제의 대사처럼 천재적인 능력을 가졌지만 수줍음이 많은 이브 생 로랑에게 피에르 베르제는 늘 그의 천재적인 창의적인 능력을 일깨줘준다. 아마 여성에게 바지 정장을 선사한 패션 혁명가 이브 생 로랑 옆에 능력있는 사업가 체질의 파트너 피에르 베르제가 없었다면 우리가 사랑하는 명품 브랜드 '이브 생 로랑'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구찌의 부활을 이끈 톰 포드와 도미니코 드 솔레, 구찌 전성시대를 이끈 알레산드로 미켈레와 마르코 비자리, 발렌티노 가라바니와 지안카를로 지아메티, 마크 제이콥스와 로버트 더피 등이 디자인과 경영을 분리한 세계 패션계의 대표적인 기크 & 슈링크 커플이다.


서울 스트릿 패션


현대 패션이 시작된 20세기의 핵심은 크리에이티브와 이노베이션이다. 100년 동안 코코 샤넬,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크리스찬 디올, 피에르 가르뎅, 칼 라거펠트, 지아니 베르사체, 알렉산더 맥퀸, 비비안 웨스트우드 등 수많은 혁명가들이 현대 패션의 기틀을 잡았다. 혁명적인 디자이너들의 선보인 혁신적 아이디어와 혁신적 스타일은 세계 패션사에서 전환기마다 눈부신 역할을 했다.


하지만 20세기 패션 디자이너들이 혁신적인 패션을 구상하고 만들어낸 것만으로 변화와 혁신이 일어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혁신적인 창조자는 기존 세상에 없었던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을 의미한다. 샤넬의 리틀 블랙 드레스나  크리스찬 디올의 뉴룩, 앙드레 쿠레주의 미니 스커트, 1980년대 파워 드레싱 등은 그동안 세상에 없었던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혁신적인 스타일을 창조하는 레전드 패션 디자이너들은  자신들이 새로 만들어내는 디자인과 스타일에 모든 초점을 맞춘다. 비즈니스나 프로모션과 같은 디자인 이외의 다른 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어느 한 가지, 혁신적인 디자인에만 초점을 맞추어 새로운 그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장인들을 '기크(Geek)'라고 부른다. 하지만 기크가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어냈다고 해도 대중들이 열광하거나 곧바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쩌면 새로운 발명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관심하다. 어쩌면 이러한 이유로 사라져간 20세기와 21세기의 혁신적인 스타일과 패션도 많을 것이다.


20세기 패션은 실루엣으로 축약된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여성해방 운동이 시작된 20년대는 튜블러 실루엣이 유행했고 경제 대공항을 겪은 30년대는 현실적이고 정제된 H라인 실루엣이 부각되었다. 2차세계 대전 이후인 1950년대는 여성미를 강조한 아워글라스 실루엣이 유행했다. 하지만 이러한 실루엣을 디자이너들이 처음 선보였을 때는 대부분의 대중들은 새로운 새로운 발명을 인식하지 못했다. 혁신적 실루엣이 생기면 그것을 알아보고 대중에게  소개하고 알리는 사람이 필요하다.


2023 F/W 서울패션위크 홍보대사 뉴진스


기크가 새로운 패션을 만들고 그 스타일을 대중에게 알리는 일도 같이 하면 최선일 것이다. 하지만 기크는 사람보다는 패션과 스타일에 더 익숙한 장인 DNA를 소유하고 있다. 이들은 패션에 대한 혁신성과 천재성과는 달리 대중들에게 자신의 패션 세계를 어떻게 알리고 마켓에서 어떻게 판매해야 하는지는 잘 알지 못했다. 패션 마케팅에는 시장이 어떤 식으로 굴러가는지, 대중이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슈링크(shrink)다. 기크가 만들어낸 혁신적 패션은 슈링크를 만났을 때 비로소 세상에 소개되고 유행이 될 수 있다.


해리포터 소설의 신화는 12군데 출판사가 거절한 원고를 블룸즈버리 출판사가 하겠다고 결정함으로써 시작됐다. 혁신이 이루어지려면 기크인 소설가 조앤 K. 롤링과 슈링크인 출판사 블룸즈버리 모두 필요했다. 또한 스티브 잡스는 미래에 대한 원대한 비전이 있었지만 직접 컴퓨터를 만들거나 프로그램을 짤 기술력은 없었다. 스티브 워즈니악은 천재 프로그래머였지만 스티브 잡스 같은 스타성이나 유창한 언변은 없었다. 잡스와 워즈니악 두 사람이 손을 잡지 않았다면 애플이라는 위대한 기업은 탄생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1990년대 정기적인 패션위크인 SFAA 컬렉션에서 시작해 세계 5대 패션으로의 진입을 시도한 K-패션의 문제 역시 슈링크의 부재에서 시작된다. 세계 8위 국가로 부상한 대한민국의 한류는 K-팝을 시작으로 드라마, 영화, 음식으로 세계 시장을 주도하고 있지만 K-패션은 가장 뒤쳐져 있다. 오히려 세계 패션계는 K-패션 보다 패셔너블한 한국의 스트리트와 혁신적인 K-컨슈머에 집중하고 있다.


K-패션은 그동안 앙드레김, 진태옥, 이신우, 여영희, 문영희, 트로아조, 이상봉, 우영미, 정욱준을 비롯한 많은 레전드 디자이너들을 70년대부터 배출했고 현재 황록, 김소희, 최유돈, 표지영, 박윤희, 박상영, 이재형, 이청청 등 많은 젊은 K-패션 디자이너들이 세계 패션의 주목을 받고 있다. 문제는 이들 K-패션의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기크들을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는 슈링크가 없다는 사실이다.


즉 화가라는 기크를 대중들에게 알리고 상품화시키는 화랑을 운영자와 큐레이터와 같은 슈링크가 없다는 사실은 아쉬운 현실이다. 물론 해외 패션 시장처럼 사입제가 아닌 위탁 판매를 하는 한국 패션 유통의 근본적인 한계가 본질적인 문제이지만 이제라도 하이엔드 K-패션의 먼 미래를 바라보는 근본적인 체질 개선이 필요할 듯 하다. 어쩌면 디자인과 경영을 함께 수행할 수 밖에 없는 K-패션의 현실에서 보면 무모한 도전일지조 모른다. 하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디자인과 경영이 분리된 글로벌 패션의 스탠다드를 따라가야 하는 것이 진리가 아닐까 한다.



2023 가을/겨울 엠로프 컬렉션

지금 글로벌 패션은 '에루사'로 대표되는 럭셔리와 자라와 H&M과 같은 패스트 패션으로 양극화된지 오래고 요즘은 중국발 쉬인과 테무와 같은 초저가 브랜드가 이커머스를 통해 미주 시장에서 히트를 치고 있다. 그럼 K-패션은 포지셔닝은은 어디인가? 패스트 패션으로 세계 시장에 도전하기에는 한계가 많다. 결국 하이엔드 패션만이 살길이다. 하이엔드 패션으로 가기 위해서는 K-패션 기크들의 헤리티지와 스토리를 만들고 이를 글로벌 마케팅과 프로모션으로 승화시킬 전문적인 슈링크가 필요하다.


현재 한국 대학과 대학원의 패션 관련 학과에서는 학생들에게 창조적인 디자이너가 되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창조적인 기크만으로 K-패션이 글로벌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 K-패션의 기크들이 창조한 스타일을 상업화하고 전세계로 전파할 슈링크들이 있어야 한다. 글로벌 시장에서 통할 수 있는 혁신적인 K-패션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슈링크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크 중심의 커리큘럼을 슈링크 배출을 믹스한 커리큘럼을 업그레이드해야 하지 않을까. 기후 변화 시대를 맞아 K-패션의 미래가 달린 세계 패션계 화두인 지속 가능성이나 에티컬 패션, 웹3.0, 메타버스, 리셀 플랫폼, 친환경 소재 개발, 순환 패션 등을 가르치는 대학도 거의 전무하다.


해외 패션에서는 일반적인 패션 큐레이터나 패션 평론가, 패션 바이어가 K-패션에는 없다. 해외 패션 캐피탈에 존재하는 패션 박물관이 서울에 없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 서울에서 루이비통과 구찌가 패션 쇼를 열고 수많은 한류 스타들이 럭셔리 브랜드의 글로벌 앰버서더로 임명되었다고 해서 K-패션 자체가 세계화되었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이제는 창의적인 디자이너인 '기크' 배출 만큼이나 비즈니스 & 프로모션 역할을 할 '슈링크' 배출에도 주력해야 할 것이다.


커버
검색
닫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