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산업 지원정책, 글로벌 경쟁력에 맞춰야 한다
2018-04-13이채연 기자 leecy@fi.co.kr
산업부·문화부·서울시·대구시-유사 지원 사업 조율할 때

디자이너·기업·플랫폼·세일즈랩 연계한 로드맵 절실


올 한해 산업통상자원부, 문화체육관광부, 서울특별시, 대구광역시 등 4개 정부 부처와 지방자치단체의 패션산업 육성 지원 예산은 약 920억 원에 이른다. 중소기업청에서 격상된 중소벤처기업부와 산업부 투자기관인 KOTRA, 서울시 출연기관인 SBA 등의 수출지원과 상권활성화, 중소상공인 지원사업을 제외하고 ‘패션산업 지원’이 명시된 예산만 더한 수치다.



 
10년 간 지원 예산만 1조, 로드맵은?
10년 전인 2008년 당시에도 지식경제부가 주도한 정부 지원예산만 1000억원에 달했다. 지난 10년 간 조 단위의 공적 자금이 투입되었건만 여전히 한국발 글로벌 패션브랜드 탄생은 기약이 없고, 지원사업의 중장기 로드맵 조차 부재하다. 어찌된 일일까.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문제 중 하나는 각 부처와 수행 기관들이 예산 확보 경쟁을 벌인 끝에 사업성을 제대로 검토, 검증하는 시스템 없이 사업을 벌려 놓기만 한 결과다. 대표적인 예로 국내 수주회를 들 수 있다. 산업부는 인디브랜드페어(올해는 연 1회 개최로 축소), 문화부는 패션코드, 서울시는 제너레이션넥스트서울(서울패션위크 행사), 대구시는 대구패션페어를 봄, 가을 비슷한 시기에 각각 진행해 왔다. 한정된 콘텐츠 자원이 수주회마다 겹치는 것은 물론이고, 상담 부스 설치와 패션쇼, 거기에 소소한 세미나를 붙이는 운영방식도 같다. 지원 대상부터 초청 바이어까지 중복되니 실효성이 매번 도마 위에 오를 수 밖에 없다.

두 번째로 지원사업 설계 단계부터 ‘산업의 활성화’가 아닌 ‘디자이너 브랜드 육성’에 초점을 두는 문제를 꼽을 수 있다. 패션산업의 주체는 디자이너만이 아니다. 디자이너, 패션기업, 소재기업, 플랫폼(온오프라인 유통채널을 비롯해 쇼룸과 세일즈랩, 전시 에이전트 등을 포괄한다)이 유기적으로 결합한 모습이 지금의 대한민국 패션산업이다. 

전문가들이 한 목소리로 말하는 디자이너 지원사업의 지향점은 ‘경쟁과 협업을 통한 밸류 업 플랫폼 만들기’다. 패션기업과 유통채널에게 새로운 사업모델을 구상할 수 있는 매력적인 플랫폼으로 어필하는 노력도 빼놓을 수 없다. 

지원사업 심사과정에 여러 번 참여했던 홍석우 패션칼럼니스트는 “비슷해 보이는 정책과 중복사업 남발, 다수지원 방침을 고수해서는 유의미한 성과를 내기 어렵다”면서 “수혜 대상이 아니라 지원 정책의 범위를 넓게 보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정책의 초점을 ‘디자이너’에서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기반 구축’에 맞추면 산업의 뿌리를 튼튼하게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다.




지원사업도 ‘선택과 집중’해야
우리나라의 지원사업 규모는 해외 사례와 비교해 뒤지지 않는 만큼 이제라도 지원사업 설계 방향의 전환을 고민해야 한다. 우선 지원대상의 자립 가능성을 고려한 ‘선택과 집중’ 전략이 필요하다.

같은 맥락에서 현재 시행 중인 몇몇 지원사업의 수정, 보완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일례로 문화부 산하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진행하는 창의브랜드 시제품제작지원사업을 살펴보자.  이 사업을 통해 선정된 최대 19명의 디자이너에게는 연간 10억원 안팎이 지원되는데, 브랜드당 평균 5000만원씩 돌아가는 셈이다. 문제는 실제 제작했는지 여부부터, 정말로 지원이 필요한 창업 초기 브랜드인지, 샘플 제작도 힘든 브랜드가 지원 이후 성장할 수 있는지 검증이 미흡하다는 것이다. 물론 제작비는 디자이너가 아니라 증빙자료를 제출하는 생산처에 실비만을 지급하지만 만에 하나 과대 청구가 되더라도 걸러내기 힘든 구조다.  

이선우 서울쇼룸 대표는 “생산기반이 없는 브랜드들에게 원부자재 수급, 봉제 프로모션까지 안정적인 생산 소싱망을 제공하면 납기 지연과 높은 공급가 문제도 일정 부분 풀 수 있다”고 말한다. 전문가 그룹이 생산량, 품질, 안전성 등 글로벌 기준에 맞는지 검증을 거친 소싱처 정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이를 시제품제작지원사업과 연계하는 방법이다. 서울쇼룸의 경우 세일즈랩이 주 업무이지만 수출 실무와 물량 확대를 어려워하는 입점 브랜드들의 생산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달 서울패션위크 기간 중 진행한 서울시 공공쇼룸 ‘하이서울쇼룸’의 패션쇼 및 수주회를 대행하면서도 같은 방식으로 계약 성사율을 높였다.

MICE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공짜 전시회도 점검이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글로벌 트레이드쇼 ‘뉴욕 패션코테리’, ‘베를린 프리미엄’의 에이전시인 sba코리아 유은아 이사는 “국내 수주회에서는 바이어와의 만남보다 정부 지원사업 참여 커리어를 쌓아 또 다른 정부지원을 받을 요량으로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는 브랜드를 종종 보게 된다”고 지적한다. 투자 여력이 아예 없는 경우나, 정부 지원을 기대하고 투자하지 않는 경우에도 ‘공평한 기회’를 줌으로써 스타브랜드를 조명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국내 전시회, ‘판’을 키우고 ‘흥’ 더해야
전문가들은 ‘판을 키워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올 봄 패션코드에는 100개 남짓, 제너레이션넥스트서울에는 88개 브랜드가 부스를 열었다. 그나마 패션코드는 경기도가 지원하는 경기창작스튜디오, 제너레이션넥스트서울은 서울시 공공쇼룸인 하이서울쇼룸과 역시 서울시가 지원하는 서울패션창작스튜디오가 상당부분 자리를 채워줬다. 수주회는 평균 2~3일, 길게는 5일씩 진행되지만 하루면 다 돌아볼 수 있는 정도다. 통상적인 수주 시즌도 아닌 때에, 100개도 되지 않는 브랜드 중 스팟 오더나 다음 시즌 상담을 하려고 일부러 찾는 해외 바이어가 얼마나 될까.

UBM코퍼레이션한국 차호근 패션프로텍트팀장은 “패션상품 세일즈를 넘어 MICE산업 경쟁력을 높이는 접근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UBM은 라스베가스매직쇼를 비롯해 뉴욕코테리쇼 주최사인 ENK인터내셔날 등을 인수합병하면서 몸집을 불리고 있는 세계 3대 전시기획사다.

차 팀장은 “최근 해외 패션 전시 주최사들은 홈페이지를 통해 전시회 참가 업체 정보를 제공하는 것에서 나아가 세계 패션 산업 정보를 제공하는 정보 제공자의 역할도 한다”면서 “페이스북, 트위터, WeChat 등 다양한 방식으로 업계 관계자들과 소통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를 참가사와 바이어 대상 마케팅에 이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쇼핑 정보뿐만 아니라 매거진, 프리젠테이션을 통해 높은 트래픽을 일으키는 무신사처럼 지속적으로 시장 정보를 발신하고 쇼룸 역할을 하는 온라인 플랫폼을 제공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유은아 이사는 “전시 경쟁력의 핵심은 양질의 바이어 확보”라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주목도를 높이는 아이디어, 검증된 바이어, 규모로 압도할 수 있는 자금, 이 삼박자가 갖춰져야 전시회도 생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올 2월 열린 ‘런던패션위크 A/W 2018’에서 한국 패션디자이너 멀티브랜드 쇼룸 쇼케이스를 관람하는 사람들



무역·소싱·마케팅 역량 갖춰야

전시참가지원이나 쇼룸운영, 팝업스토어 개설 등 해외마케팅 지원사업에 대한 전문가들의 점수는 국내 전시 보다는 후한 편이다. 문화부의 ‘컨셉코리아’, 서울시의 ‘텐쏘울’ 프로젝트 등은 사이먼 콜린스 FCD 디렉터, 수지 멘키스 보그 패션에디터 같은 영향력 있는 인물들의 입을 빌어 인지도와 위상이 높아졌다는 평가다. 문화부가 뉴욕에 설치하는 융복합 쇼케이스도 편집숍 오프닝세레모니, 미국패션디자이너협회, 피프티투쇼룸, IMG 등 든든한 현지 멘토단을 확보했기에 추진이 가능했다. 서울시가 영국패션협회와 교류협약을 맺고 런던패션위크와 서울패션위크에 공식 프로그램을 넣기로 했다는 소식도 반가운 뉴스다. 영국패션협회는 체계적인 신진 디자이너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고, 런던패션위크는 파리나 밀라노컬렉션에 비해 외국인, 신인 디자이너에게 열려있다.


전문가들은 국내외 지원사업을 막론하고 ‘실무 전문성’을 강조한다.


이선우 대표는 “지원사업의 실효성을 좌우하는 우선순위를 ‘전문가집단과의 네트워킹’에 두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는 “해외 쇼룸을 개설한다고 하면 바이어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현지 미디어와 인플루언서 소싱 먼저 시작해야 한다”면서 “해외에 국가가 지원하는 쇼룸을 만든다고 해도 세일즈를 성사시킬 능력이 있는 현지 세일즈랩, 세일즈매니저를 확보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전문성 없는 ‘단체’ 배제해야
전문성 부재의 가장 큰 폐해는 지원주체의 방만함과 사업성과 부풀리기로 나타난다. 한 예로 패션산업은 섬유산업의 종속산업이 아님에도 산업부는 해외 패션전시회 참가지원사업 예산을 섬산련으로 몰아준다. ‘패션 브랜딩’ 전문성이 없는 섬산련의 국가관은 참가 브랜드 규모나 바이어 흥행 면에서 발전이 없다. 그나마 부산디자인센터, 대경섬산연, 의류협회, 패션협회 등 섬산련의 예산파워를 무시할 수 없는 기관과 단체들이 전전세처럼 부스를 채운다.  

대구시의 경우 시설보수를 포함해 운영비를 지급하는 각종 단체와 시설만 7개다. 올 해는 창업인프라로 활용한다는 지식산업센터도 만든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패션전문가뿐만 아니라 지역 언론에서도 통폐합을 재촉해 왔다. 지금은 섬유개발연구원과 염색기술연구원, 패션산업연구원, 3개 연구원 통합 논의가 급 물살을 타고 있다. 공동수행 프로젝트가 다수인데다가 시가 운영비를 지원하고 일감까지 주니 재정자립이 요원하다는 이유다.

유은아 이사는 “마케팅 지원의 성과를 가르는 핵심은 사전, 사후 팔로우 업”이라고 단언한다.

해외 전시참가 지원사업, 특히 국가관의 경우 좋은 위치를 선점할 수 있도록 사전에 주최측과 협상하고 해당 전시에서 가장 비즈니스 규모가 큰 세일즈랩과 손잡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무자는 디자이너에게 자립이 가능한 구체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제시하는 컨설턴트이자 매니저 역할이라는 것. 예를 들어 참가사의 컨디션에 맞춰 소량, 고가 오더가 일어나는 유럽전시를 공략할 것인지, 물량을 늘려 아시아권 전시를 공략할 것인지 조언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