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17 이슬 기자 ls@fi.co.kr
기자의 시각 - 이슬 패션인사이트 기자

‘You are not free’
패션인의 축제, 서울패션위크가 성황리에 끝났다. 그런데 그날 있었던 한 퍼포먼스가 SNS를 통해 일파만파 퍼지면서 씁쓸함과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패션 디자이너들의 꿈의 무대가 열리던 날, 동시에 패션 디자이너를 꿈꾸는 사람들이 피켓을 들고 시위에 나섰던 것. 피켓에는 ‘You are not free’, ‘실밥 먹고 살란 말이냐 적정임금 보상하라’, ‘패션계의 더러운 생태계를 고발한다’ 등 적나라한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들은 패션 디자이너의 꿈을 꾸고 패션계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생계를 이어가기 어려운 보수와 디자인을 배울 엄두조차 낼 수 없는 노동 현실에 부딪힌 막막함을 토로했다.
사건의 중심은 국내는 물론 파리, 뉴욕 등 해외에서도 대표적인 한국 패션 디자이너로 명성이 자자한 A씨가 자신을 위해 일하는 디자인실 직원들에게 명성에 걸맞지 않는 수준의 월급을 지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에 따르면 정직원은 110~130만원 사이, 인턴은 30만원, 견습생은 10만원의 월급을 받았다.
밤낮없이, 휴일없이 일한 보상은 최저임금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월급과 6000원으로 제한받는 저녁식대가 전부였다. 하지만 이것은 사건의 일부였다.
# 국내 유명 패션기업의 해외컬렉션팀에 인턴으로 들어간 B씨. 이곳은 인턴을 뽑아 한달 씩만 채용하는 ‘인턴 돌려막기’를 하고 있었다. 상사의 눈에 든 B씨는 가족과 친구의 명의를 빌려 매달 새로운 이름으로 열심히 근무했다. 언젠가 정직원이 될 것이라는 희망도 잃지 않았다. 하지만 어제까지 함께 파리컬렉션을 준비했던 실장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B씨에게 전화를 걸어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통보했다.
# 부산에 있는 디자이너 브랜드에 입사한 C씨. 그는 두타 공모전에서 수상의 문턱까지 가고, 패션대전에도 입상한 나름 실력파였다. 하지만 C씨의 첫 급여는 60만원. 주업무는 공장 핸들링, 제품 포장하기, 팝업스토어 판매사원이었다. 60만원을 받아 교통비와 식대까지 모두 해결했던 C씨는 팝업스토어에서 함께 일하던 단기 알바생이 150만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곤 충격을 받았다.
# 매번 면접에서 떨어지는 D씨. 이유는 170cm가 채 되지 않는 키와 허리사이즈 26인치가 넘는 몸매 때문이다. D씨는 “면접을 보러가면 열심히 준비해온 포트폴리오는 보지도 않고 오로지 내 몸매만 평가한다. 한 번은 면접을 보러 온 사람들을 한 줄로 쭉 세워놓고 몸매 심사를 한 적도 있었다. 전신 성형이라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수치스러웠다”고 솔직한 경험담을 털어놨다.
위 사례들은 피켓시위를 한 패션노조에게 제보된 내용이다. 단지 일한 시간과 양에 비해 부족한 보수만이 문제가 아니라 한달 씩만 채용하는 인턴 돌려막기, 디자이너로 들어왔지만 제품을 포장하는 것이 전부인 업무, 비용 절감을 위해 막내 디자이너와 피팅 모델을 동시에 채용하려는 몸뚱아리 평가까지 업계에 뿌리박혀 있는 관행들이 모두 본질적인 문제다.
높아진 한국 패션의 위상만큼 이제는 인력을 키우는 내부 시스템도 달라진 모습을 보여야 할 때다. 더 나은 한국 패션의 미래를 고민하고, 좋은 인재들이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줘야 할 기성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욕심에만 눈이 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패션노조는 앞으로 비슷한 처지에 놓인 디자이너 지망생들의 제보를 모아 국가인권위원회, 고용노동부에 진정서를 체출하는 등 악습의 뿌리를 뽑기 위한 노력을 지속해나갈 계획이다. 실제로 디자이너 A씨의 디자인실 월급이 화제로 떠오르자 이 회사는 최근 직원들과 월 120만원 급여를 지급한다는 근로계약서를 작성했다. 업계 큰 손인 디자이너가 변화의 모습을 보인 만큼 다른 디자이너와 패션업체들에게도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기대를 가져본다.
또한 한 순간 화젯거리에 지나지 않기 위해서는 정부와 디자이너 단체들이 나서야 할 것이다.
이들의 보수와 인권을 지켜줄 수 있는 관련 법을 제정하거나 감시·보호 기관을 설립해 내부 시스템 정착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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