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9-29 GY인터내셔널 윤태영 이사
윤태영의 패션소비 칼럼
현대 소비사회에서 부는 더 이상 상류계급을 상징하는 지위 표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물론 부가 상류계급을 규정하는 데 있어 필요조건임은 여전한 사실이다.
그러나 현대사회에 와서 부는 필요조건일 뿐 상류계급으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선 또 다른 충분조건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문화(자본)이다.
재벌가의 상속녀가 들고 있는 명품 백(bag)이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를 다니기 시작한 신입 여직원의 백과 다르지 않다면, 상속녀의 입장에서 좋은 기분 일리 없을 것이다.
현대 소비사회에서 명품은 돈만 주면 언제든지 구입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물론 신입 여직원은 그 백을 구입하기 위해 수개월, 아니 그 이상의 경제적 고통도 기꺼이 감내한다.
따라서 재벌가의 상속녀에게 그 백은 더 이상 그녀를 구별지어 주는 사물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명품을 구입할 수 있을 때 명품의 사용은 더 이상 상류계층을 표시하는 기호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현대사회 상류계층에겐 그리고 그 상속녀에겐 구별짓기를 위한 새로운 기제가 필요하게 된다.
이렇게 새로운 차이화 기제에 대한 수요는 상류층으로 하여금 과시적 소비에서 검소함의 소비로, 양적인 과시에서 질적인 차이로, 그리고 돈에서 교양과 문화로 이행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게 하였다.
이를 두고 보드리야르는 상류층이 보여주는 검소함을 ‘사치보다 더 한 사치’라고 하였다. 과소비에 대한 구별짓기로 상류층이 보여주는 검소함과 과소소비는 패션에서 브랜드 로고를 드러내지 않는 ‘logoless’ 를 이해하는 기초가 된다.
한편 문화자본의 역할과 중요성을 강조한 학자로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가 있다. 그는 현대사회에서의 자본을 세 가지 형태로 나누었는데 경제적 자본, 문화적 자본, 사회적 자본이 바로 그것이다. 경제적 자본이야 더 설명이 필요 없을 듯 하다. 중요한 것은 그가 말하는 문화적 자본이다.
실제로 부르디외는 그의 저서 『구별짓기』에서 문화자본이야말로 현대사회에서 새로운 계급(계층)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지표임을 강조하였다. 그에 따르면 개인이 어떤 문화적 취향을 갖고 어떤 종류의 문화를 소비하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계급을 드러내는 실마리가 된다고 하였다.
또한 개인의 취향과 문화소비 경향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개개인의 재능이나 기호가 다르기 때문만이 아니라, 출신계급(계층), 교육 등과 같은 사회문화적인 환경의 차이가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하였다.
◇ 문화는 현대사회 계급을 구분하는 지표
이러한 문화자본은 가정환경, 가정교육과 같이 어려서부터 내면적으로 형성되기도 하고, 클래식을 향유하고 문화예술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능력처럼 오랫동안 관심과 노력을 기울일 때 형성되기도 한다.
특히 개개인에게 체화된 상태의 문화적 자본은 주입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자본이 풍부한 환경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었을 때 형성된다. 고급 예술이나 클래식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안목이나 취향은 돈으로 살 수 없을 뿐 아니라, 짧은 시간에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유는 미술과 음악 같은 예술에 대한 취향은 어릴 때부터 가까이 했던 사람만이 어른이 되어서도 제대로 즐길 수 있기 때문이란다. 이렇게 미술과 음악을 포함한 예술과 문화적 취향은 새로운 계급적 사치재로 기능하게 되었다.
현대사회에서 계층간의 불평등은 경제분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화 분야에서 더욱 커지고 있다. 박물관을 둘러보고 연주회나 전시회를 관람하는 등의 정신적 삶의 부재는 현대인들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고 있다.
이는 그대로 상류층의 사회적 차이화를 위한 새로운 기제로 기능한다. 뒤늦게 이를 눈치챈 중간계층들은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부랴부랴 이들을 모방하기에 바쁘다.
그런데 이번엔 그전과는 상황이 완전히 다름을 깨닫는다. 예전처럼 돈으로, 과시적 소비로, 과시적 여가를 통해 그들을 따라 잡기가 쉽지 않게 된 것이다. 문화란 앞서 얘기한 것처럼 백화점에 가서 돈을 주고 구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상속자’에서 묘사되었듯 문화자본을 보유하지 못한 이들이 ‘졸부’란 호명 속에 그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모습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동경하는 계층에 대한 끊임없는 모방과 추종에 대한 열정은 문화자본의 체화 및 축적 역시 시간의 문제일 뿐 신성불가침한 무엇으로 남겨두지 않는다.
최근 서점가를 비롯한 사회 곳곳에서 불고 있는 인문학의 열풍도 문화자본에 대한 일반 대중의 욕구가 반영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다소 시간은 걸리겠지만 사치가 민주화되고, 패션이 민주화되어 왔듯이 마침내 문화자본에 대한 향유 및 소비 역시 대중화, 민주화되는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지금까지의 물질적 재화에 대한 과소비에서 정신적이고 문화적인 영역에서의 과소비로 이행되어 간다면 우리 시대 삶의 내용은 더욱 풍부해질 것임이 자명하다. 문화자본이 사회적 계층과 지위의 구별짓기를 위한 기제로서 그 역할을 다하는 날까지 문화적 삶이 우리의 일상을 강물처럼 흐르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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