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0-29 이화순 기자 lhs@fi.co.kr
‘한국 패션의 산증인이자 문화혁명가’ 노라노

◇ '명자'를 버리고 '노라'를 선택한 문화 혁명가
노라노(본명 노명자·85). 건강이 허락하는 한 오늘도 옷을 만드는 영원한 패션디자이너다.여든 중반에도 여전히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그녀에게 우리는 '한국 패션 디자이너 1호', '한국 패션의 산증인', '국내 최초의 기성복 제작자'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더 저렴한 가격에 더 멋진 옷을 만들어 사회에 들어선 여성들을 응원하고 싶었다"는 그녀.
그녀의 이름 '노라'를 보라. '명자'라는 본명을 밀어낸 '노라'는 노르웨이가 자랑하는 극작가 헨리크 입센(Hernik Ibsen)의 연극 '인형의 집'(1879년 초연)의 여주인공 이름이다. 근대극의 출발을 알린, 동시에 여성해방운동을 선포한 이 작품에서 노라는 남편에게 '독립'을 선언하고 가출하는 상징적인 장면을 통해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아 나선 여인상이다.
노라노의 인생을 보면 단순한 패션인이 아니다. 그녀는 '인형의 집' 속 노라처럼 한국 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고, 패션 디자이너라는 자신만의 존재감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문화혁명가였다. 서구의 패션 트렌드를 전수하는데 그치지 않고, 최은희, 엄앵란, 김지미 등 당대 한국 영화의 아이콘이 그녀의 패션의 세례를 받도록 했다.

◇ 한국 패션 산증인의 삶 조명
노라노의 이러한 삶과 인생이 영화와 전시로 재조명되고 있다. 31일에는 노라노의 삶을 토대로 재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노라노'가 개봉한다. 또 30일부터 12월 15일까지 서울 종로구 세종로 신문박물관에서 '노라노:자료로 보는 노라노발 기성복 패션의 역사'전도 열린다.
다큐영화 '노라노'는 우리나라의 '패션'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라는 물음에서 출발한다. 지난해 용산참사를 다룬 다큐 '두개의 문'으로 화제가 됐던 연분홍치마가 제작을 맡았다. 영화는 지난해 열린 '노라노 60주년 기념 전시회'인 '라 비 앙 로즈'를 준비하는 과정을 큰 줄기로 삼는다. 16일 서울 건대 롯데시네마에서 열린 시사회에 참석한 노라노 선생은 "내가 현재 만 85세인데, 30대 후반의 손녀딸 벌 되는 애들이 와서 영화를 찍겠다고 했는데, 믿음직스럽지 않더라. 근데 3년을 따라다니는 것을 보고 그냥 내버려뒀다"고 말했다.
서은영 스타일리스트는 "코코 샤넬, 소니아 니켈, 비비안 웨스트우드 등과 같은 선상에서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내 나라의 디자이너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 현실이 슬펐다"고 말했다. 가수 윤복희는 "노라노 선생은 옷을 통해 사회의 고정관념을 확 뒤집어버렸다"고 찬사를 보내고, 배우 엄앵란은 "감독은 연기자를 연출하지만, 노라노 선생은 전체 의상을 연출했다. 대중문화의 기수였다"고 고백한다.
30일 오픈하는 전시는 신문을 통해 근현대의 사회 문화사를 조망하고, 다층적 언론문화 아카이브로 기능해 온 신문박물관 Presseum의 기획전이다.
노라노는 그 출생부터 범상치 않았다. 1928년 한국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을 설립한 아버지(노창성)와 한국 최초의 여자 아나운서인 어머니(이옥경)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어린 딸에게 양장을 예쁘게 입혔다.
하지만 세계 제2차 대전이 발발한 즈음 17세 나이로 전쟁통에 결혼, 우여곡절끝에 이혼을 당했다.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 주인공 노라의 이름을 따 '노라'라는 이름을 지었다. 1947년 20세의 나이로 미국 유학을 떠났던 그녀는 우리나라 근대 문화에 '패션'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 다큐멘터리로, 신문박물관 기획전시로 대중과 만나다
1952년 '노라노의 집'을 열고 당대 귀부인들의 고급 맞춤복을 제작하며 명성을 얻었다. 1956년 반도호텔에서 국내 최초로 패션쇼를 열었으며, 1963년 그동안 축적했던 고객들의 신체 사이즈 통계를 바탕으로 기성복을 처음으로 만들기 시작하면서 국내 패션 업계에 수많은 '최초' 기록을 세웠다.
그가 디자인한 윤복희의 미니스커트, 펄시스터즈의 판탈롱 패션 등이 크게 히트해 대중문화에도 큰 영향력을 끼쳤다. 기성복의 탄생과 발전은 섬유 산업의 발달로 이어졌다. 또 실크 수출의 촉진을 위해 뉴욕에서 바이어 쇼를 열었던 그녀는 이를 계기로 뉴욕에 진출하기도 했다. 1970년대엔 미국 메이시스백화점 쇼윈도에 그녀의 옷이 전시되기도 했다.
이번 전시는 패션 디자이너로서 화려했던 노라노의 삶 보다, 선구안적이고 실용주의적 시각으로 기성복 시대를 열었던 노라노의 행보와 서구 모던 사회의 교양과 사고의 전달자로서 노라노가 당대에 맡았던 역할에 주목한다.
전시에서는 사진과 드로잉 자료들, 신문의 기고물과 보도물 등 다양한 미디어 자료 등을 만나볼 수 있으며, 개인 소장 아카이브를 통해 노라노가 지녔던 선진적 시각과 통찰, 소비 주체로서의 여성 대중이 탄생하던 한국 근현대의 사회 문화적 변화의 흐름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당시 노라노의 여정을 보여주는 신문 사진 의복자료 등을 4개의 전시 섹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시 기간 10월 30일(수)~12월 15일(일)
▷관람 시간 오전 10시~ 오후 6시(월요일 휴관)
▷전시 장소 신문박물관 Presseum 02-2020-1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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