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우의 보이후드> 한국 패션이 주목할 만한 젊은 디자이너들
2018-04-30 yourboyhood@gmail.com
홍석우 패션 에세이스트

‘랜스’ ‘르이엘’ ‘바농스튜디오’

온라인 편집숍에 들어서는 순간 종종 까마득해진다. 3000여 개가 넘는 패션 브랜드가 서로 다른 매력으로 손짓하는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업계가 아무리 불황이라고 외쳐도, 젊은 패션 디자이너들은 여전히 옷을 짓고 브랜드를 전개하며, 자신이 믿는 무언가를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컬렉션을 선보인다.

여기 소개하는 세 개의 브랜드는 설립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하지만 각자 뚜렷한 색을 보여주고자 노력한다. 젊은 패션 디자이너들이 만드는 컬렉션에는 기성 패션 브랜드가 시도하지 않는 자유로움과 취향, 그리고 아직 사람 냄새가 나는 고민과 창조가 함께 있다.

이들은 각기 다른 컬렉션과 프레젠테이션을 선보이고, 한 벌의 옷이 나오는 데 드는 수고로움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자신들에게 적확한 온라인과 오프라인 매장을 찾기 위해 고심을 거듭한다.


'랜스' 디자이너 윤대우(좌)와 안솔(우)

‘랜스(LIJNS)’가 짓는 서울의 남성복


안솔, 윤대우 ‘랜스’ 디자이너 인터뷰

런던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 예술 대학과 영국 왕립 예술학교에서 남성복 석사를 취득하고 ‘폴 스미스’ ‘빅터앤롤프’ ‘서피스투에어’에서 디자이너를 거친 안솔과 도쿄 문화복장학원 복장과 졸업 후 파리에서 프리랜스 패턴 메이커로 일한 윤대우는 2016년 4월, 서울에서 ‘랜스’를 론칭했다. 둘 다 남성복을 배웠기 때문에 남성복 브랜드를 만드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랜스’는 한남동에 작은 쇼룸과 서울패션창작스튜디오에 사무실을 두고 작업을 병행한다. 스포츠웨어에 기반을 두고, 미니멀리즘과 고급 기성복을 지향하는 남성복을 만든다. 처음 그들의 컬렉션을 보기 시작한 2017년도 봄 이래, 아직 많은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몇 번이고 새로운 작업이 궁금해지는 이유가 선명하게 존재한다.


남성복도 여러 갈래로 나뉜다. ‘듀오’ 디자이너로서, 하나의 브랜드를 만드는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 작업을 나누나?
윤대우(이하 윤):
‘랜스’의 거의 모든 과정을 둘이서 만든다. 규모가 작기 때문에 일인다역을 해야 한다.

안솔(이하 안): 다만, 서로 전공이 다른 만큼 지식 깊이도 조금씩 다르다. 옷을 만드는 부분은 윤대우가 더 개입하고, 남자로서 옷을 실제로 입었을 때 느끼는 부분도 조언 받는다. 


손으로 만든 룩북과 프레젠테이션 연출처럼 ‘보이는’ 부분이 흥미롭고 강점으로 느껴진다. 하나의 패션 브랜드로서 시각화 과정은 어떻게 이뤄지나?
: 첫 시즌을 준비할 때부터 포트폴리오처럼 정리하자고 마음 먹었다. 요즘은 디지털 매체도 발달했고, 참조할 수 있는 레퍼런스도 흔하다. 우리 색을 보여줄 방법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디지털에 특화한 요소보단 옛날 방식, 즉 어느 정도 아날로그 요소가 첨가된 형식으로 무언가 해보고, 그것을 자료로 정리하여 남겨두기로 했다. 훗날 어떤 계기가 생겼을 때, 그걸 더 잘 설명할 수도 있지 않을까. 컬렉션을 공개하면서 단순히 과거에 무언가를 보고, 이것이 나왔다는 건 별로 재미가 없다. 과정을 잘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아날로그와 연결되었다.


기성복이지만, 손길이 많이 들어가는 옷을 짓는다. 수제작 방식을 이어가는 이유가 있다면
윤:
아카이브를 모으는 이유와 연결된다. ‘랜스’는 남성 기성복 브랜드이지만, 우리에게는 ‘작업’이기도 하다. 손으로 해야지 좀 더 날 것 같다. 고급 기성복 브랜드에서 소비자가 느낄 수 있는 디자이너의 마음도 포함되어 있다. 일부러 올이 풀리는 옷을 만들 때도 있는데, 이미 사람들이 정한 규칙과 기술을 실험해보고 싶다.

: 청개구리처럼 말이다. 기성복에서 이렇게 마감한다면, 그렇게 하기 싫어진다. 끝을 깔끔하게 처리하는 게 정석이라면, 그냥 자르고 싶다. (웃음) 원래 공장에서 삼봉 처리해야 하는 박음질을 직접 재봉틀로 완성하기도 한다. ‘꼭 그렇게 해야 해’라고 누가 말하면, 왜 그래야 하는지 생각한다. 그렇게 완성하여 구조적으로 딱딱한 옷이 아닌, 더 부드러운 옷을 만들고 싶어서 타협하지 않을 때도 있다.


도쿄와 런던, 그리고 파리를 거쳐 서울에 왔다. 다른 도시의 패션 시스템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후, 서울에서 남성복 브랜드를 만들면서 드는 생각도 많을 듯한데
: 몇 시간 안에 끝나지 않을 정도로 사연이 많다. 서울에서 패션 브랜드를 만든다는 것은 쉽지 않다. 상업적으로 설득하고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도록 하면서, 동시에 우리에겐 예술이기도 하다. 두 가지를 공존하며 살아남는 게 어렵다.

윤: 요리에는 정찬, 즉 파인 다이닝(fine dining)이 있고 예술도 여러 갈래 중 순수 예술(fine art) 같은 장르가 있다. 그런데 서울에 와서 부딪혀보니 왜 ‘파인 패션(fine fashion)’은 드물까 싶었다. 패션 안에서 항상 그것을 염두에 두면서 브랜딩하고 있다.


색이 뚜렷한 브랜드를 만들면서, 작은 패션 브랜드로서 유통과 생산에 관한 고민도 클 듯하다
윤:
사실 브랜드로서 생존 문제가 매년 고민이다. 좋은 편집매장이 있다면 판매처를 늘리고 싶다. 지금 우리 가격대와 이미지를 포용해 줄 곳 찾는 게 어렵다. 한 곳 있었는데, 대기업이 운영하는 곳이라서 결재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가령 ‘랜스’는 니트웨어가 주력 상품 중 하나인데, 한국에서 니트웨어를 생산하는 게 어려워서 홍콩에서 생산한다. 주변에서 스웨터를 만든다면 좀 신기하게 본다. 홍콩에서 잘 도와줄 때 우리도 판매처를 늘리고 수량을 늘려서 보답해야 하는데…. 홍콩 공장도 수량이 많지 않은 편이라 남는 게 거의 없을 거다.

: 아이엠샵도 좋고 분더샵도 좋다. 타 브랜드보다 상대적으로 옷이 저렴하지 않은 편이라 그 가격대를 수용하는 고객들이 찾는 매장에 걸고 싶다. 여전히 고민이 많다. 왜 외국에 있지 않고 한국에 왔느냐고 물어볼 때도 있다. 외국에 있을 때는 한국 패션의 미래가 이제 정말 밝지 않나 싶었다. ‘우영미’ ‘준지’처럼 유명한 남성복 브랜드도 많다. 하지만 막상 들어와 보니, 아직 변두리이지만 역시 쉽지 않다.


면과 선이 우아하게 교차하는 여성복 ‘르이엘’


'르이엘'


2017년 브랜드를 선보인 이래, ‘르이엘’의 이혜연은 이제 막 두 번째 런웨이 컬렉션을 마쳤다. 그가 만드는 옷은 ‘공간의 확장’이란 문장과 닮았다. 흰색과 검정을 비롯한 무채색은 새틴과 면, 실크와 비닐 질감이 나는 PVC 합성 소재를 넘나들며 하나의 객체로서 살아난다. 카멜색 울 코트는 절개 부위에 강렬한 붉은색을 넣은 치마와 만나고, 종종 선과 면의 접합을 직선적으로 드러낸 흰 셔츠가 뒷받침한다.

군더더기 없이 풍성한 실루엣으로 몸을 감싸는 코트 시리즈는 요란한 장식 대신 주황색의 면을 겹친 옷깃 안쪽에 넣는다. 자칫 무덤덤해 보일 수 있는 옷에 정갈한 디테일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니, 차분하면서도 정교한 겨울 외투들이 빛을 발한다. 허리를 덮는 짧은 감색 재킷과 치마는 하얀 블라우스와 함께 찰랑거리는 스트랩으로 경쾌한 걸음걸이를 표현하고, 스웨트 셔츠와 펜슬 팬츠라는 단출한 조합에는 울 소재 긴 코트 단면을 잘라낸 반코트를 겹쳐 입어 경건한 의식처럼 둘렀다.

‘르이엘’ 컬렉션이 선과 면, 그리고 색의 대비를 즐겨 사용하는 이유는 디자이너 자신이 근현대 추상 표현주의 작가들에게 받은 영감이 컸다. 색과 면을 쌓아 캔버스 위 평면을 입체적인 공간으로 변모한 마크 로스코의 작업이 특히 그랬다. 베이지와 네이비, 주색과 검정, 흰색의 대비와 조우는 각각 코트와 재킷, 셔츠와 치마가 지닌 ‘면’과 ‘선’, 즉 옷과 실루엣의 중첩 지대로 만났다가 흩어진다. 옷들은 여전히 간결한 최소주의 선배들을 떠오르게 했다. ‘르이엘’의 컬렉션이 젊은 브랜드답지 않게 너무 성숙한 것은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설픈 청년문화 youth culture 모방으로 부족한 밑천을 드러내기보다, 브랜드를 관통하는 커다란 주제를 몇 시즌에 걸쳐 서서히 보여주는 디자이너가 어떤 면에서 더 훌륭하다.

“(옷의) 각 조각은 고정적이기도 하지만, 유연하게 변형하면서 확장합니다.” ‘르이엘’ 컬렉션은 척 보기에 입기 쉽다. 조금 더 들여다보면, 생각한 것보다 정교하게 지은 심상을 옷으로 풀어내는 걸 알게 된다.

청년문화와 언더그라운드 정서를 담은 남성복, ‘바농스튜디오’
젊은 패션 디자이너의 신선한 컬렉션을 마주하는 것은 관록 있는 베테랑의 완성도 높은 컬렉션과는 또다른 재미를 준다. 2017년 ‘바농스튜디오’를 설립한 양영환은 지난 두 시즌, 두 번의 오프 스케줄 컬렉션을 거쳐 제너레이션 넥스트 무대에 섰다. 짐짓 생경한 브랜드를 디자이너는 직접 이렇게 소개한다. “다양한 가치관을 존중하고, 그들의 차이를 좁히는 방법을 연구하는 브랜드입니다. 사람과 단체, 사회를 규정하지 않고 모두가 향유할 수 있는 옷, 나아가 문화를 만드는 것을 지향합니다.” 바농은 제주 방언으로 ‘바늘’을 뜻한다. 청년 문화(유스 컬쳐)와 언더그라운드 정서가 받아들인 다양한 문화 요소들을 모아 바늘로 한 땀씩 지은 이 브랜드는 차근차근 영역을 넓힌다.


‘바농스튜디오’의 옷에는 표면 아래 숨은 이야기가 있다. 단지 자신을 돋보이고자, 유행에 편승하여 사라지는 옷과는 조금 결이 다르다. 그 안에는 지역 문화를 자각하는 디자이너가 시도하는 과감 무쌍함과 자유로움이 존재한다. 옷에 쓰이지 않는 산업용 소재와 스트랩을 본디지와 밀리터리 스타일로 풀어낸 PCV 비닐 소재 바지, 레인코트와 아노락을 결합하고 광택 나는 표면을 더한 여성용 재킷은 동시대적이면서 절대다수와는 다른 길이다. 스웨트 셔츠 아래 셔츠를 해체한 치마를 걸치고, 성별 구분이 모호한 긴 상의와 셔츠 드레스를 입은 남성 모델이 무대 위를 활보하는 것 또한 디자이너가 바라본 문화를 정의하는 자의적 결과다.


겉에 보이는 요즘 청년문화의 소수 취향 ‘이미지’가 쇼 전반을 지배해도, 사실 하나씩 옷을 뜯어보면 기성복을 짓는 브랜드의 고민도 엿보인다. 차분한 감색 레인코트는 쌀쌀한 날씨에 바로 입을 만큼 탄탄하고, 옷깃을 목까지 추켜올린 쥐색 코트는 초겨울 눈 내리는 날 입기 좋을 것이다. 바농스튜디오 컬렉션을 보며 여러 심상이 떠올랐다. 영화 ‘매트릭스 Matrix’, 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을 관통한 테크노 전자음악, 익숙하지 않은 것들을 섞고 다시 조합하는 믹스앤매치 문화 같은 것들 말이다.


'바농스튜디오'


지금 서울의 젊은 패션 디자이너들은 생존과 유통, 생산을 고민하면서도 작업 과정을 즐긴다. 또한, 그 안에서 뻗어 나가는 가지를 하나씩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쉽지 않은 과정을 거치고 있다. 모바일 시대에 유행처럼 번지는 아날로그와 청년문화, 다양한 영감과 기억의 잔재들은 깊은 고민을 거친 형태로 점점 실체가 되어 옷에 스며들고, 고객들을 마주한다. 개인적인 바람을 하나 덧붙이면, 이 생소한 이름들이 다른 거대하고 이미 성공한 브랜드만큼 익숙하지 않다고 해서 그대로 잊혀지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