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테러의 여파로 관광객이 감소하고, 뒤이은 미-이라크 전쟁으로 럭셔리업계가 침체에 빠졌을 때도 단단한 매출을 기록하며 파워를 과시한 「버버리」. 영국 럭셔리 브랜드의 자부심을 살리고 젊은 이미지로 성공적인 변신을 꾀하며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는 「버버리」를 관찰하면 한 사람의 모습에 시선이 고정된다. 장난꾸러기 미소년 같은 모습으로 248년 전통의 「버버리」를 이끌고 있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크리스토퍼 베일리를 만나보자.
지난 2001년, 당시 30세의 나이로 「버버리」의 디자인 디렉터로 발탁된 크리스토퍼 베일리는 런던에 위치한 로열아트칼리지에서 패션을 공부하던 중 이곳을 방문한 디자이너 도나 카란에게 호평을 받아 18세에 불과하던 1990년에 「도나카란」의 뉴욕패션하우스에 입성했다.
여기서 2년 반 동안 디자이너 피터 스펠리오 폴로스의 오른팔로 일하며 뛰어난 현장감각을 보인 그는 톰 포드의 제안으로 「구찌」로 자리를 옮겨 1995∼2001년까지 수석 디자이너로 활약했다. 이후 「버버리」의 대혁신을 이끌고 있던 로즈 마리 브라보(Rose Marie Bravo)에게 발탁되어 2001년 「버버리」에 입성했다. 다른 디자이너들은 쉽게 얻기 힘든 최상의 코스를 연달아 이어오며 젊은 「버버리」를 만들어낸 그의 비결은 무엇일까?
현실적인, 너무나 현실적인 디자이너
베일리의 가장 큰 특징은 매우 현실적이라는 점이다. 그는 디자이너인 체하는 우월감과 소비자의 패션을 리드한다는 자만심을 드러내지 않고 소비자들이 입을 수 있고,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옷을 만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도발적인 매력과 카리스마로 대중을 이끌었던 톰 포드, 미소년 같은 모습으로 만인의 연인으로 추앙받는 마크 제이콥스, 래퍼 같은 직설적 표현과 대담한 행동으로 시선을 모으는 알렉산더 맥퀸 등 비슷한 연배의 인기 디자이너들과 달리 베일리는 디자인에 영감을 주는 연예인이나 상류층 연인(일명 ‘뮤즈’라 불리는)을 내세우지도 않고, 방송매체에 노출되려고 힘을 쓰지도 않고 비평가들의 시선을 끌어모으기 위한 ‘쇼킹하고 현란한’ 런어웨이 쇼를 벌이지도 않는다.
대신 이슬비가 가뭄을 적시듯 적당한 품격과 적당한 스타일 감각, 적당한 모더니즘을 가미한 ‘입을 수 있는’ 스타일로 소비자들을 서서히 잠식했다. 말하자면 ‘입기도 편하고 품위와 경쾌함도 놓치지 않는’ 매우 현실적인 럭셔리 스타일이 바로 크리스토퍼 베일리가 세계 패션계에서 성공한 원동력인 셈이다.
베일리는, “디자이너에게 디자인 영감을 주는 뮤즈는 매순간 급변하는 패션과 인간의 속성을 생각할 때 ‘불가능한 허세’이며 소비자들은 누군가가 패션을 ‘지도’한다는 데 거부감을 갖는 만큼 특정 디자이너에게 특정 여성이 ‘뮤즈’라는 통념은 가식적이다”라는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보여주는 것보다 ‘생활 속의 소비자가 입을 수 있는 스타일’을 만든다는 베일리의 생각은 화려하고 있는 체하는 럭셔리의 기본 속성을 과감히 탈피한 것으로서 젊고, 잘 팔리는 「버버리」를 이뤄낸 가장 큰 동력이다.
2005 봄·여름 밀라노 남성복 컬렉션의 시선을 독차지한 것은 마크 제이콥스였지만, 베일리는 부담없는 럭셔리 디자인으로 지난해 「버버리」 매출 1억달러를 달성하게 한 일등 공신으로 그의 주가를 높여가고 있다.
‘영국적’이라는 틀을 깨다
크리스토퍼 베일리는 지나치게 ‘영국적’이라는 개념에 묶여 있던 「버버리」를 전세계 소비자들이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스타일로 변화시킨 주역이다.
「버버리」는 유럽인들이 미개척지 탐험에 열중하던 1856년 토마스 「버버리」가 ‘날씨에 잘 견디는’ 옷을 선보이며 런칭된 후 아문센의 남극 탐험, 알콕&브라운의 태평양 비행 횡단에 착용한 옷으로 세계인의 시선을 끌었다. 또한 영국군이 군복으로, 오드리 헵번이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 트렌치 코트를 입고 등장, 패션계에 눈도장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변함없는 스타일과 단조롭고 지루한 (영국적) 이미지를 고수하면서 ‘중년 여인들을 위한 심심한 브랜드’로 취급받다가 미국 출신의 유통 전문가 로즈마리 브라보가 취임하면서 대대적인 이미지 개편에 들어갔다. 로즈 마리 브라보가 ‘현실적인 패션감각’을 갖고 있는 베일리를 발탁한 것은 바로 ‘영국적인 전통을 갖고 있되 미국적 현실주의’에 익숙한 베일리의 대륙을 넘나드는 감성 때문이다.
베일리는, “로고나 주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입었을 때 자연스럽고 멋진 옷이 중요하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이 같은 생각은 매시즌 컨셉과 테마를 중시하는 일반 디자이너들과 다른 것으로, 과감한 컬러나 패턴의 변화가 도입된 ‘모던 버버리’의 탄생을 가져왔다. 전통에 기반을 두되 생활옷을 만들어내는 것이 베일
예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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