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유산 Great Heritage 44

유럽의 명품 브랜드들은 브랜드의 존재 이유와 당위성을 스토리텔링을 통해 공고히 한다. 그 스토리텔링의 핵심은 긴 세월 동안 브랜드의 생명력을 유지했다는 점이다.
대부분 10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브랜드를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뛰어난 품질과 디자인 때문이며, 이러한 특징들은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가치를 지닌다고 말한다. 그러는 동안 많은 유명인의 선택을 받아 역사적 장면을 남겼고, 대중적으로도 인기를 얻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런데 좋은 디자인이라는 것은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처럼 그 공의 우열을 가리기 힘들때가 있다. 원칙적으로는 누군가, 어떤 디자이너의 노력으로 처음 만들어졌을 테지만, 결국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의 선택을 받아온 것이 그 브랜드하면 생각나는 클래식한 디자인으로 남게 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좋은 디자인은 디자이너가 만든 것인가, 소비자가 만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때로는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실용적인 이유 덕분에 클래식한 디자인이 탄생하기도 한다. 영국하면 떠오르는 브랜드 ‘버버리’가 바로 이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버버리’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트렌치 코트 대신 사용되는 단어일 정도로 그 브랜드 자체를 의미한다. 버버리가, 아니 트렌치코트가 탄생하지 않았다면 간절기에 우리는 무엇을 입고 살았을까 싶을 정도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랑 받는 아이템이다.
그런데 이 트렌치 코트의 탄생과정을 살펴보면 소재 개발과 디자인적 측면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포목상이었던 토마스 버버리는 비가 자주 오는 영국 날씨에서 무거운 레인코트로 인해 불편해 하는 많은 사람들의 불만을 개선하고 싶어했다. 당시에 레인코트는 방수를 위해 고무 재질로 만들어져 무겁고 불편한 옷이었다.
소재 개발에 연구하던 중 그는 영국의 양치기와 농부, 마부들이 야외에서 비에 젖지 않기 위해 걸치던 스목 프록(smock frock)이라는 겉옷에서 영감을 받았다. 스목 프록은 린넨과 울로 만들어져 물빨래가 가능했고, 가볍고 튼튼해 실용적인 작업복이었다.
마침내 1888년, 버버리는 ‘개버딘’이라는 이름을 붙인 방수가 되는 소재를 개발하고 특허를 냈다. 방수 처리를 한 면사를 이용하여 직조한 후 다시 한 번 방수 처리를 하여 방수 기능이 뛰어났고, 보온력과 통기성도 뛰어나 여름의 열기와 겨울의 추위를 막아주었다. 게다가 가벼웠다. 곧 ‘개버딘’은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직물이 되었다. 1891년 그렇게 브랜드 ‘버버리’가 탄생하였다.
하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버버리는 ‘개버딘’이라는 소재를 개발한 것이지, 지금과 같은 디자인의 트렌치 코트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트렌치 코트가 만들어지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전쟁 때문이었다.

1895년 남아프리카에서 벌어진 ‘보어 전쟁’에서 영국군은 방수성이 뛰어난 버버리의 ‘개버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장교를 위한 군용 방수복을 주문하게 된다.
이 때 만든 타이로켄(tielocken)이라는 코트는 트렌치 코트의 전신이다. 마치 샤워 가운처럼 단추 없이 벨트 끈으로만 묶는 코트였다. 버버리가 제작한 코트 덕분인지, 보어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끝났고, 토마스 버버리는 영국 왕실의 지정 상인이 되었다.
1900년대가 되자 자동차에 대한 수요와 공급이 늘어나 일반인들에게도 야외 활동의 기회가 늘어났고, 스포츠웨어가 함께 발전하기 시작했다. 버버리는 곧 개버딘으로 만든 캠핑 장비와 등산복 등을 만들며 또 다시 한 단계 도약했다. 마치 요즘의 고어텍스 같은 소재와 함께 일어난 등산복 붐에 비견할 수 있는 현상이었다.
개버딘 소재는 남극탐험 같은 혹한의 추위나 비행기로 대서양을 최초로 횡단한 역사적 사건에서도 그 역할을 당당히 해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보어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연합군은 버버리사에 50만 벌의 코트를 주문하게 된다.
하지만 참호(Trench)를 파서 그 안에 몸을 숨기고 총을 쏘는 방식으로 변화한 전쟁 환경 때문에, 장교복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소매나 옷 안으로 흙먼지가 들어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도록 소매 끝에 끈을, 앞 여밈에는 단추를 달았다.
또한 총을 매거나 쏠 때 옷이 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가슴 부위에 건 패치(Gun patch)를 달았다.
쌍안경과 방독면을 달기 위한 어깨 견장도 이 때 만들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트렌치 코트의 전형이 탄생한 순간이다.
이렇게 만든 트렌치 코트는 전쟁 후에 집으로 복귀한 장교들에 의해 일상 생활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고, ‘버버리’ 매장에서는 일반 사람들을 위한 판매를 시작하였다.

또한 많은 영화의 주인공들과 정계와 재계의 인사들이 ‘버버리’의 트렌치 코트를 입고 대중 앞에 서면서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홍보가 되었다.
이렇듯 실용적인 이유로 개발된 ‘개버딘’이라는 소재와 ‘트렌치 코트’ 디자인의 역사는 ‘버버리’가 다른 명품 브랜드와는 다른 차별성을 갖게 한다. 즉, 왕족이나 귀족만을 위한 사치재가 아닌, 처음부터 일반 사람들이 즐겨 입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소위 명품 브랜드라 구별 짓는 ‘럭셔리 브랜드’들은 왕족과 귀족, 또는 자본가, 즉 돈 많은 계층을 위한 제품을 만들면서 생겨났으며, 일반인, 즉 노동 계급은 쉽게 가질 수 없는 고급 제품들을 만들고 판매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그런 면에서 실용성을 위해 시작된 ‘버버리’의 이야기는 오히려 불황의 시대나 대중명품의 시대에는 더 잊히지 않는 가치가 될 것이며,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시 한번 명품 브랜드의 가치는 무엇인가, 위대한 유산이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만든다.

고학수 객원기자
marchberr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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