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굼허(GOOMHEO)’가 만드는 크고 작은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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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우의 Style 인사이트 09

2024-05-10 오후 3:3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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굼허(GOOMHEO) 2024년도 봄/여름 프레젠테이션 겸 오픈 스튜디오(ⓒ Images Courtesy of Hong Sukwoo)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여러 차례 ‘굼허(GOOMHEO)’의 작업들을 보았고, 지난 겨울에 이어 두 번째로 서울의 작업실에서 연 오픈 스튜디오 겸 프레젠테이션에 갔다.


굼허의 허금연 디자이너는 2024년도 가을/겨울 시즌 ‘런어웨이(runaway)’ 컬렉션에 ‘창작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도피해야 할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라는 주제를 담고 싶었다고 했다. 항상 느끼지만 요즘은 더욱더 생각하는 주제라서 십분 공감하였다.


◇ 운명과도 같은 패션과의 조우


굼허가 막 패션계 사람들의 이목을 끌 무렵, <i-D>매거진의 의뢰로 짧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굼허의 크리에이티브에 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자신의 이름을 딴 남성복 브랜드 굼허를 만들기 훨씬 전, 10대 시절 허금연의 꿈은 동시통역사였다. 고등학생 시절 미국 일리노이주로 1년간 떠난 교환학생 생활 또한 패션과는 무관했다. 그러다 우연히 세계의 패션 학교를 소개하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무엇에 홀린 듯이 ‘패션을 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포트폴리오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 칼리지 오브 아트 앤 디자인의 학사 졸업 컬렉션을 준비하며 그는 다시 한번 생각이 바뀌었다. “막연히 파리나 런던의 패션 하우스에 취직해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졸업 컬렉션을 준비하면서, 나의 컬렉션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무척 흥미진진했습니다. 컬렉션을 완성할 즈음에는 이미 석사 과정을 지원하고, ‘내 브랜드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졌어요.”


석사 졸업 컬렉션을 마친 후, 그는 영국의 젊은 패션 디자이너를 후원하는 패션 이스트(Fashion East)의 지원으로 지금까지 총 네 번의 컬렉션을 선보였다. ‘초현실적이고 대담한 남성성의 새로운 비전(surreal, bold, new vision of masculinity)’을 중심 가치로 둔 굼허의 컬렉션은 옷으로 표현하는 실험과 혼돈이 조화를 이룬다. 주름 소재와 디지털 그래픽, 인체의 곡선을 유려하게 해석하는 드레이핑 같은 요소가 한눈에는 불협화음 같지만, 이내 화음을 이루며 한 벌이 완성된다.


“실제로 굼허의 컬렉션은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스타일링할 수 있는 재미있는 요소가 많아요. 누가 어떻게 옷을 입는지는 결국 입는 사람이 결정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면, 굼허는 남성복으로 정의할 수 있다. 하지만 과장된 프릴 같은 여성복 요소 또한 곳곳에 깃들어 있다. 허금연은 기성세대가 제안한 사회적인 의복 대신 ‘자신을 가장 잘 나타내는 방법’의 하나로서 옷을 짓는다. 새로운 소재와 시대를 막론한 디자인에 고전적인 기술이 가미된 옷이다. 그래서인지 굼허의 컬렉션에는 신선한 기운이 가득 차 있다. 그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마냥 보기 좋고 멋진 옷이 아니라, 마음을 울리는 감정적인 옷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다


그는 젊은 브랜드를 이끄는 디자이너로서, 패션 이스트와 네 시즌을 같이하며 보고 배운 것은 너무나도 많았다.


옷을 만드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스타일리스트와 협업하고, 촬영을 준비하고, 협업을 조율하는 과정 같은 것은 학교에서 배우지 않은 영역이었다. 여러 사람과 작업하며 도움을 받고, 매 시즌을 마치고 함께 리뷰하며 다음 시즌을 준비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다.


“디자인 개발부터 컬렉션 제작, 홍보와 촬영, 경영까지 전부 관여해야 하니까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죠.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많지만, 10년 후 스스로 성장한 모습을 상상해보곤 합니다.”


그는 자신의 브랜드를 발전시켜 나가면서, 다양하고 재능 넘치는 디자이너와 예술가들과 함께 한국 패션 씬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아직 어떤 한국인도 이루지 못한 ‘패션 하우스’의 아티스틱 디렉터가 되는 것 또한 허금연이 그리는 미래의 모습 중 하나다. ‘10년, 20년 후에도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드는 것이 패션 디자이너가 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방법’이라는 그에게, 미래의 목표가 허황한 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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굼허(GOOMHEO) 2024년도 가을/겨울 프레젠테이션 겸 오픈 스튜디오(ⓒ Images Courtesy of Hong Sukwoo)



◇ 솔직, 고민, 유머, 그리고 매력


훌쩍 시간이 지난 몇 달 전, 굼허의 첫 번째 오픈 스튜디오에 방문했다. 굼허가 서울로 기반을 옮기며 연 첫 번째 오프라인 행사는 짐짓 화려해 보이는 소셜 미디어 속 다양한 이미지, 몇 번의 컬렉션, 무엇보다 한 벌의 옷이 ‘어떤 고민과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가’를 압축하여 알려준 자리였다.


작업과 시간의 아카이브(archive)를 문자 그대로 모아 저장한 기록을 선보인 방식이라고나 할까. 그러한 이야기를 하기에 가장 좋은 곳은 소문난 동네의 유명 대여 공간이 아닌, 실제로 굼허의 작업이 이루어지는 스튜디오였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과 브랜드를 만드는 이들이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상호 작용은 굼허가 그려온 몇 년간의 서사로 구현되어, 디자이너가 공부하고 시작한 런던이 아닌, 이곳 서울에서 한 번 쉼표를 찍은 느낌이었다.


새로운 ‘런어웨이’ 컬렉션은 홀치기 염색을 십분 활용한 스웨트셔츠와 데님 팬츠 시리즈부터 소매를 한 번 더 어깨에 두를 수 있도록 고안한 코트, 군용 항공 점퍼의 부자재를 통해 허리선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변형한 MA-1 재킷 그리고 넉넉한 오버사이즈 코트 같은 것이 함께했다. 면과 곡선을 신발의 주요한 디테일로 사용한 무릎길이의 가죽 부츠와 인조 모피(faux fur)를 사용한 과장된 모자는 이 브랜드가 소개하는 길이 보통 사람들의 일반 상식을 가볍게 비틀며 주는 유머(혹은 용기)처럼 느껴졌다.


지난 오픈 스튜디오 겸 프젠테이션과 또 다른 방식으로 펼친 케이터링은 브랜드가 표현하는 새 컬렉션 주제를 한껏 반영하면서도, 고심의 흔적과 부드러운 유머가 공존했다.


허금연 디자이너와 절친한 ‘진존잼(Jin Jon Jam)’의 류경진 디렉터는 진존잼 포 베리(Jinjonjam for Berry)’라는 이름으로 F&B 케이터링 작업을 하는데, 흔히 행사장에 어울리는 음식을 모나지 않게 선보이는 차원을 넘어서, (추측건대) 끈끈한 사적인 관계에서 비롯한 대화와 디자이너로서 구현하고 싶은 방식을 깊이 이해하고 만들어냈다.


프레젠테이션과 케이터링이 부딪히거나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이를테면 동등한 수준의 균형을 이루며, 오프라인 공간에 나타나는 오브제로서 기능하게 했다(게다가 맛있다!). 이는 대단한 재능이며, 서로에게 좋은 상승효과를 주지 않을까 싶다.


젊은 패션 브랜드로서, 굼허는 아직 작지만 하나의 세계관을 만들어가는 컬렉션을 선보인다. 우연한 기회의 짧은 인연을 시작으로 곳곳에서 그의 작업을 여럿 보았고, 자신의 브랜드와 그 외의 작업이 주는 신선한 분위기가 항상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또한, 프레젠테이션 현장에 있는 스태프들과 굼허의 친구들은 그야말로 브랜드가 선사하는 옷의 이야기를 즐긴다. 관찰자 입장에서 이러한 브랜드가 걸어가는 모습을 (드문드문) 바라보고, 기록으로 남겨두는 것은 일종의 의무와도 비슷하다. 작은 것들이 만드는 시에는 항상 비대한 것들이 주기 어려운
매력이 있었다.



홍석우
yourboyhood@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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