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패션가가 러시아 패션과 사랑에 빠진 것처럼 올 시즌 유럽 패션가도 러시아적 영감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 지난 한두 해 아프리카 풍 사파리 콘셉트에 매료되었던 디자이너들이 이제 러시아에 시선을 돌렸다고나 할까?
패션 디자이너들이 러시안 패션을 흠모하는 배경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우아하고 기품 있고 지극히 페미닌한 볼쇼이 발레 풍 디자인과 <안나 카레리나>에서 나오는 러시아 장교의 품격 있는 테일러드 스타일이 그 주인공.
공상과학 영화에 어울릴 법한 미래지향적인 스타일에 빠져 있던 디자이너 장 폴 고티에는 올 시즌 볼쇼이발레단에서 볼 법한 러시아 민속의상을 모던하고 로맨틱하게 해석한 디자인을 내놓았는데, 러시아적 감성을 ‘제대로’ 담기 위해 우크라이나까지 찾아갔던 고티에의 정성이 그의 꾸뛰르 컬렉션에 녹아 있다.
또한 정통 패션하우스 에르메스(Hermes)를 지휘하면서 정제된 클래식 감성에 매료되었지만 주체할 수 없는 실험성을 갖고 있는 그답게 자체 디자인창고에서 찾아낸 에르메스의 1930년대 풍 디자인을 재해석한 기하학적인 디자인에 러시안 정서를 녹여 세련되고 모던한 에르메스의 이미지를 창출해 내기까지 했다.
이 밖에 모스코바 출신의 디자이너 이고르 쇼퍼린은 러시안 발레를 주제로 한 디자인을 선보였고, 코스튬내셔널(Costume National)은 러시아 발레의 영웅 루돌프 누레예프에서 영감을 얻은 남성복 컬렉션을, 디자이너 안토니 오 마라스 역시 러시안 발레로 대변되는 로맨틱하고 우아한 감성을 그의 디자인에 선보이며 러시아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다.
러시아, 디자인 창구이자 달콤한 신천지
러시아가 패션가의 화두로 떠오른 것은 러시아시장이 새로운 매출 구축지를 찾는 패션가의 중요한 신규 시장으로 부상했고, 오랜 역사를 가진 러시아의 패션―페미닌하고 우아한 발레리나 룩과 금장 단추와 모피로 대변되는 기품 있고 격조 있는 러시안 사관 룩, 플라워 패턴과 리본, 사랑스런 컬러로 유명한 민속풍―이 영감의 원천을 찾는 디자이너들의 자원으로 인기를 끌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자본주의적 세상에 눈을 뜬 러시아가 적극적으로 이들 디자이너를 끌어들이고, 볼쇼이발레단이 재기에 성공하며 서구의 시선을 다시 끌고, 유럽과 미국의 도시에서 러시아 예술 관련 전시회가 지속적으로 펼쳐지면서 문화와 예술 면에서 러시아 파워가 커지고 있는 것도 한몫 한다.
세계 패션가를 주름잡는 유명 모델들이 거의 러시아, 혹은 러시아 연방국 출신이어서 이들의 아름다움의 배경이 되는 러시아에 대한 관심이 디자이너들과 소비자들을 자극하고 있는 것도 한 이유. 이는 지젤 번천 같은 라틴아메리카 출신의 모델이 인기를 끌면서 판초나 하바이아나 등 라틴풍 아이템이 트렌드를 이끌고 패션계에서 라틴아메리카 출신 디자이너들의 위상이 높아진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실제로 미 모스코바에 매장을 오픈하고, 러시아시장 잡기에 부산한 고티에는 우크라이아 민속의상 특유의 컬러인 화이트·레드와 리본 장식, 민속풍 숄, 밀집바구니 속에서 모던한 페전트 룩의 가능성을 엿보았다고 밝히면서도 러시아시장이 패션가에 중요한 시장으로 등장한 만큼 러시아 패션에 대한 디자이너들의 관심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암시를 은근슬쩍 흘린다.
이는 럭셔리 패션 하우스들은 물론 하이스트리트 브랜드들까지 잠재적 매출 구축지로 부상한 러시아시장에 몰려드는 패션가의 현실과 패션가에 부는 러시아 바람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증거다.
한편 겐조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안토니오 마라는 볼쇼이 발레리나 풍 스타일로 컬렉션을 구성한 것은 물론, 모스크바로 달려가 겐조의 러시아 입성 10주년 기념행사를 펼치는 등 안팎으로 러시아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느라 분주한데, 러시안 민속풍 정서에 심취한 고티에와 달리 러시안 발레가 마라스의 테마다.
실제로 마라는 러시아에 머무는 동안 볼쇼이발레단은 물론 생피터스버그의 마린스키 극단을 찾는 등 품격 있고 우아한 러시안 발레와 무대의상에 애착을 드러냈다. 한마디로 말해서 마라스가 러시아에 접근하는 방식은 러시아의 무대 문화에 대한 이해로서 모던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던 작곡가 스트라빈스키, 프로키예프, 발레리나 아나파블로바, 영화계에 큰 획을 그은 영화감독 아이젠시 타인, 라리 노프, 곤차 로바, 말레 베치 등 러시아 문화에 의미를 남긴 화가들을 통로로 삼아 장식적이면서도 귀족적 품위를 잃지 않는 실루엣과 화려하면서도 절제된 컬러, 그 속에 남아 있는 대륙적 로맨티시즘을 자신의 컬렉션에 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러시아에 매료된 디자이너(및 브랜드)는 고티에와 마라스만이 아니다. 미우미우(MiuMiu)는 노골적인 러시아적 정서를 표방하진 않았지만 모피 트림과 에스닉한 플로럴 패턴
예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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