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키니 모델은 가고 리얼 우먼이 온다? 과도한 비약일지 모르지만 최근 패션가에 어리고 빼빼 마른 모델보다는 볼륨 있고 성숙한 모델들이 런웨이에 빈번히 등장한다.
한동안 패션가를 뒤흔들었던 말라깽이 모델 퇴출 소동을 생각하면 늦은 감도 없지 않지만 매우 바람직하다. 리얼 우먼이라고 해도 진짜 현실 속의 여성 보다는 과도하게 날씬하고 불가능에 가까운 신체 비율을 갖고 있는 체형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션계가 ‘살집 좀 있는 모델’을 무대에 세운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80년대 모델부터 일반인 모델까지
파리 패션주간에 열린 샤넬 쇼는 이 같은 흐름을 잘 읽을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다. 샤넬 런웨이 무대에는 빈약한 체형의 어린 모델 대신 1980년대의 톱 모델 이네스델라프레샹주와 1990년대를 풍미한 스텔라테넌트 등 관록있는 옛 모델을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쇼가 끝난 후 진행된 인터뷰에서 칼라거펠트는 패션이 더 이상 10대 어린애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드러내면서 마르고 어린 모델에 대한 싫증을 입증했다. 따라서 당분간 샤넬의 무대는 좀 더 관록있고 성숙한, 실제 소비자와 비슷한 연령대의 모델을 볼 수 있을 듯.
디자이너 자일스디콘이 첫 지휘를 맡은 패션하우스 웅가로(Ungaro)는 전문 모델과 다양한 연령층의 비전문 모델을 무대에 올려 ‘리얼 우먼’ 이라는 명제에 좀 더 근접한 모양새를 보인 경우로 패션쇼가 펼쳐진 공간도 실내 잔디에서 모델들이 티파티를 즐기며 수다 떠는 형식으로 구성, ‘패션이 현실로 내려앉은 듯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혁신에 가까운 패션쇼를 구성한 이유에 대해 자일스디콘은 ‘애들이 아닌 여자를 위한 디자인’을 하는 만큼 당연하다는 태도를 보여 더 이상 ‘보여주는 패션’이 아니라 ‘진짜 여성에게 팔기 위한 제품으로서의 패션’이라는 콘셉이 디자이너들 사이에 힘을 얻고 있음을 입증했다.
발렌시아가 또한 ‘어리고 깡마른 모델에 대한 싫증’을 드러낸 패션하우스 중의 하나로 이번 런웨이 무대에는 임신한 모델 미란다커와 비전문 여성들이 무대를 채웠고 장폴고띠에는 깡마른 것과 거리가 먼, 플러스 사이즈 모델들을 무대에 올렸는가 하면 존갈리아노는 파리 패션주간에 1980년대, 90년대에 활동했던 완숙한 모델을 통해 소비자들에게 한발 더 다가가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게스끼에르는 아예 길거리 캐스팅을 통해 선택한 일반 여성들을 탑 모델 프레제베야와 함께 런웨이에 등장시켜 ‘다양한 키와 체형의 진짜 여성이 입었을 때 특정 디자인이 어떻게 해석 될지’ 궁금해 했던 많은 여성들에게 친절한 본보기를 보여주는 센스를 발휘했다.
그는 패션은 다양한 성격과 개성을 반영하고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설명, 런웨이가 더 이상 10대 말라깽이 모델들로 가득한 획일적인 공간이 아니라는 시각을 드러냈다.
패션계의 자성? 혹은 영리한 전략
이 같은 ‘말라깽이 모델 벗어나기’ 움직임은 밀라노 패션 주간에서도 감지된 바 있다. 프라다 런웨이에는 허리를 강조한 볼륨감 넘치는 모델들이 자리했고 루이비통 무대에도 레티샤카스타, 엘맥퍼슨 등 완숙하고 글래머러스한 모델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모델들의 연령과 체중이 모두 ‘증가’한 모양새를 보인 바 있다.
패션 잡지들도 상황은 마찬가지로 이미 오래 전부터 다소 현실감 있는 체형의 모델을 등장 시켰던 마리끌레르는 물론 보그나 바자 등도 좀더 살집 있는 모델을 화보에 등장시켜, 화보 또한 다소 풍성해진 느낌을 주고 있다.
그렇다면 오랫동안 패션계를 조여 왔던 ‘말라깽이 모델 논란’이 왜 이제야 약발을 보이는 듯한 모양새를 띠게 된 것일까?
거식증과 약물 중독, 혹은 과도한 다이어트에 시달린 어린 모델들의 건강에 대한 우려와 ‘마른 여성이 아름답다’는 왜곡된 인식을 조장한다는 비난에도 ‘디자인의 분위기를 잘 살려주는 모델을 선정할 뿐’이라는 논리를 펼치거나 ‘거식증 논란은 태생적으로 모델 체형이 아닌 여성들이 억지로 모델을 꿈꾸다 생긴 부작용’이고 잘라 말하며 패션계가 여성의 신체상을 왜곡한다는 논리에 불쾌감을 표시해왔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의 변화는 다소 당황스럽다.
특히 20대 초반의 모델까지 ‘늙은 모델’로 치부될 정도로 10대 모델- 심지어 14살, 15살 모델까지도 등장시켜 ‘어리고 마른 것이 아름답다’는 메시지를 잘도 설파해왔던 관행을 생각하면 자녀를 출산해 가슴과 엉덩이 부분에 볼륨이 더해진 과거의 수퍼 모델들과 길거리 캐스팅으로 선택한 일반 모델을 무대에 올린 것은 이노베이션에 가까울 정도이다.
소비자는 어린 말라깽이 아닌 ‘진짜 여자’
이유는 간단하다.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 체지방 지수를 기준으로 한 ‘건강한 모델’ 척도를 제시하고 모델의 인권을 위해 ‘18세 미만 모델은 런웨이에서 퇴출’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정치가와 영향학자, 심지어 사회학자들이 ‘모델의 건강과 어린 모델 착취’ 문제를 들먹이며 ‘사회적 책임’을 주장할 때도 ‘선택의 자유’를 외쳤던 패션계의 보호막을 낮추게 한 힘은 바로 ‘매출을 올리기 위한’ 절대적 필요성 때문이다.
글로벌 불황으로 그 어느 때보다 지독한 매출 하락을 경험하며 위기감을 느꼈던 패션계가 소비자의 지갑을 열고, 소비를 촉진시키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소비층-즉 연령대가 있는 일반 체형의 여성들의 눈길을 끌만한 일종의 ‘이벤트’적 요소로 런웨이 무대에 완숙하고 다소 살집 있는-그럼에도 절대 일반인의 체형이 아닌 완벽한 비율의 모델을 전진 배치하는 카드를 내밀게 된 것.
다시 말해서 런웨이 무대의 ‘리얼 우먼’들은 실질적으로 지갑을 여는 현실속의 ‘리얼 우먼’들을 자극하고 환상을 심어주기 위한 일종의 ‘미끼 상품’이자 콧대 높던 패션계가 매출 구축에 매우 아쉬워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디자이너들이 ‘성숙하고 아름다운 자신에 찬 여성’을 찬양하고 그들이 진정한 ‘패션의 대상’이라며 새삼 입이 마르게 칭찬을 해대고 있는 것은 결국 패션의 소비자는 실질 소비력을 갖추지 못한 ‘말라깽이 10대들’이 아닌 ‘지갑과 체형이 풍부한’ 리얼 우먼이라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루이비통이나 돌체&가바나가 50대의 마돈나를 광고 캠페인에 등장시킨 것 또한 자본력 풍부하고 자기 관리 잘 된 ‘있는 여성’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임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절대적 미학에서 상식으로 전환
전문가들 또한 글로벌 불황이 패션계에 20-50대 여성 소비자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면서 럭셔리 업계가 극단적 ‘미학, 혹은 글래머’에서 ‘상식’을 찾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진단한다.
즉 금융 불안을 겪은 소비자들이 좀더 까다롭고 가치있는 소비를 추구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이들의 마음을 열고 지갑을 열게 할 매력적인 구실로 런웨이의 ‘리얼 우먼’을 내세우게 된 것.
이 같은 의도는 패션계의 골든 타임이었던 1980~90년대를 주도했던 수퍼 모델을 재등장시켜 '완숙한 여인도 아름답다‘는 메시지를 설파하려고 한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결국 매출 상승 문제는 디자이너도 고개 숙이게 한다.
예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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