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년간 패션계를 강타했던 글로벌 금융 위기는 이제 희미한 그림자가 되어가고 있지만 유례 없는 금융 위기에 혹독한 시련을 겪은 럭셔리 패션계는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냉정한 전쟁터로 변모하고 있다.
20세기 말 수익 중심의 사업 전략으로 무장한 LVMH가 대중과의 거리감을 둔 채 자아 도취에 빠져있던 럭셔리 업계에 치열한 경쟁 의식을 촉발한다며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금융 위기는 지극히 단순한 사업 원리인 ‘팔리지 않으면 죽는다’를 일깨우는 잔인한 시험대가 되었던 것이다.
럭셔리 업계, 적자생존의 정글 방불
실험적이고 화려한 디자인 크리에이티비티로 찬양받았지만 결국 매출 부진으로 파산 신청에 돌입한 패션하우스 크리스챤라크로와, 유동 자본 압박으로 인해 매각설에 시달렸던 프라다, 휴고보스, 발렌티노 등은 아무리 이름 있는 브랜드라도 매출이 뒤따르지 않으면 결국 패션 전쟁터의 패잔병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체험하게 해준 사례다.
동시에 럭셔리 패션계는 방만한 브랜드 경영보다는 실속있는 브랜드-소비자들의 지갑을 열게 하는 매출 구축력이 높은 브랜드-를 중심으로 보완적 브랜드를 분산 배치, 수익의 안정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정비해 시장 장악력이 약할 수밖에 없는 소규모 신규 디자이너 브랜드들의 입지는 더욱 약화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럭셔리 업계가 ‘단순히 몸집 불리기에 머물지 않고 매출 중심의 브랜드 구성’의 중요성을 절감하면서 지난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마크제이콥스나 스텔라매카트니, 혹은 알렉산더맥퀸처럼 유망한 디자이너 브랜드가 럭셔리 업계의 매력적인 인수 대상으로 주목받는 현상은 한 동안 기대하기 힘들 것으로 전망된다.
즉 글로벌 불황으로 ‘수익이 보장되지 않는 브랜드’를 인수하고 투자를 집행을 피하는 현상이 강화되면서 재능 있는 신진 디자이너들의 럭셔리 시장 진입은 물론 신진 디자이너들이 사세를 확장할 수 있는 기회는 더욱 어려워지는 상황이다.
어떤 면에서 글로벌 불황은 진입 장벽이 다소 완화되고 시장 다변화가 이뤄지는 듯했던 럭셔리 시장이 다시 단단한 고객층을 확보하고 있는 몇몇 브랜드들이 주도하던 과거의 모습으로 회귀하는 현상을 유발하는 원인으로 작용한 것. 이처럼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들에 대한 장벽이 높아지고 그들만의 리그로 재편되는 모습을 보이는 럭셔리 시장의 변화된 모습 앞에서 한 동안 각광받던 틈새 럭셔리 브랜드들의 설 곳은 점점 줄어둘 수밖에 없다.
힘 있는 브랜드만 살아 남는다
일각에서는 울트라 럭셔리, 혹은 It Bag이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로 럭셔리 업계가 과도하게 몸집이 불고 상업화된데다 글로벌 불황으로 ‘매출’이 더욱 강조되면서 더 많은 고객을 유인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 자본이 풍부한 브랜드, 혹은 수익성 높은 브랜드를 확보하고 있는 럭셔리 제국이 시장을 장악할 수밖에 없다고 진단한다.
이 말은 곧 소비자 인지도가 높고 더 많은 소비자에게 접근할 수 있는 유통망을 갖추고, 더 많은 고객을 포섭할 수 있는 마케팅을 펼칠 수 있는 럭셔리 브랜드만이 럭셔리 업계의 적자로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에 따라 LVMH나 구찌그룹 등 수익성 높은 브랜드를 축으로 기타 산하 브랜드들이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하며 ‘위험 분산 정책'을 펼칠 수 있는 럭셔리 제국들이 글로벌 불황에 상대적으로 강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과 일치한다.
물론 버버리(Burberry)나 코치(Coach) 등은 상대적으로 작은 몸집에도 매력적인 디자인과 효율적인 머천다이징 구성을 통해 성공적으로 불황에 대처, 반드시 몸집이 크지 않더라도 ’브랜드‘ 자체의 힘을 키울 수 있다는 점을 입증했지만 자본력과 브랜드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의 경우에는 이 같은 파워를 발휘하기가 힘들어 글로벌 불황이 규모가 작은 디자이너 브랜드에게 더 큰 위협으로 작용하는 원인이 되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규모가 작은 디자이너들은 어려운 환경을 정면 돌파하는 것보다는 자본이 풍부한 사모펀드에 브랜드를 매각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글로벌 불황에 주춤했던 사모펀드들이 다시 어패럴 시장에 관심을 보이고 있어 경쟁력 강화를 위해 몸집을 불리기 원하는 디자이너 브랜드들은 그들의 성장을 지원해줄 수 있는 투자 능력이 있는 사모펀드의 움직임을 면밀히 살펴보고 있는 상황.
그렇다면 유동 자본 확보의 통로로 기대되고 있지만 글로벌 금융 시장 악화로 진행되지 못했던 럭셔리 브랜드들의 주식상장(IPO) 전망은 어떨까? 전문가들은 유럽 발 금융 시장 불안이 암초로 자리하고 미국 금융 시장도 혼돈을 거듭하고 있는 지금 럭셔리 리테일러나 디자이너 브랜드가 주식 상장을 시도하기는 힘들다고 내다보고 있다.
자본력 빵빵 사모펀드들 어패럴 시장 눈독
한편 불황을 견뎌낸 럭셔리 브랜드들이 인적 쇄신이나 구조조정을 통해 소비자의 시선을 끌고 새출발을 다짐하는 면모를 보이고 있어 눈길을 끈다.
린제이로한을 아티스틱 디렉터로 영입하는 초강수를 두면서 젊고 보다 대중적 이미지를 덧칠하려다 이미지 추락을 경험한 에마뉴엘웅가로는 얼마 전 자일스디콘을 영입, 이미지 쇄신에 나섰다. 지미추의 창업주 타마라멜론은 선임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자리를 옮겨 경영일선에 디자인 현장으로 자리를 옮겨 제품 디자인, 홍보, 광고 및 캠페인 등 브랜드 이미지를 총괄할 예정이다.
또한 에르메스는 장폴고티에와 결별하고 라코스테를 젊고 매력적인 브랜드로 일궈낸 디자이너 크리스토프라메어를 영입, 하이엔드 아방가르드 느낌에 주력했던 에르메스 여성용 컬렉션을 보다 소비자와 친근한 스포츠웨어 분위기로 전환시키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 같은 움직임은 매출을 증가시키려는 목적을 기반으로 한 것인 동시에 1920년 쉬크한 스포티브 패션으로 시작된 에르메스의 전통으로 되돌아가는 의미도 갖고 있다.
장 폴 고티에의 에르메스는 비평가들의 높은 찬사를 받은 반면 리테일 시장에서는 그에 상응하는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했고 성공한 여성의 머스트해브 아이템으로 자리한 버킨백의 수요가 줄고 있어 여성복 부문의 적자를 상쇄하는데 힘이 빠진 모습을 보였던 것이 사실.
그런 만큼 노쇠한 이미지의 라코스테를 젊고 ‘탐낼만한’ 스포티 스트릿웨어로 되살려 매출 활력을 이끌어낸 크리스프퍼라메어의 영입이 에르메스 어패럴의 시장 접근력을 높이는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처럼 럭셔리 업계가 디자이너 개각을 통해 브랜드 이미지 쇄신을 시도하고 있다면 럭셔리 제국 LVMH는 향수 디비젼의 리스트럭쳐링을 진행, 한 지붕 멀티 브랜드 전략을 확대하며 위험 분산정책을 심화시키고 매출을 확대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LVMH 산하 향수 디비젼은 겐조와 지방시가 매출을 이끌고 있지만 펜디(Fendi) 향수를 론칭하고 기존의 푸치(Pucci) 향수의 유통망을 확대, 매출을 늘리는 것이 LVMH가 향수 디비젼을 확장 보강하려는 목적.
이밖에 브리오니(Brioni) 그룹은 알레한드로델라꾸아를 영입, 브리오니 여성복 웨어의 지휘봉을 맡겨 브리오니의 사업 중추인 여성용 컬렉션을 강화, 럭셔리 여성복 시장의 점유율을 확대하려는 야심찬 계획의 시동을 걸었다.
인적 쇄신이든 구조조정이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럭셔리 시장이 더욱 냉정한 사업 논리로 무장하고 있고 시장의 변화를 헤쳐 나갈 수 있는 힘 있는 브랜드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적자생존의 현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패럴 업계가 불안하게 지켜보는 그리스 발 유럽 금융 시장의 혼돈이 이 같은 분위기를 더욱 자극할 것임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다.
예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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