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젠 습관이 되어버린 하이엔드 디자이너의 매스마켓 나들이(하이스트리트 업체와 하이엔드 디자이너의 만남)이 초창기의 활력을 잃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2004년 카리스마와 신비감으로 무장한 샤넬의 디자이너, 칼라거펠트가 하이스트리트 체인 H&M과 리미티드 컬렉션을 출시했을 때 패션계는 ‘패션 시장의 계급이 무너지는 지진 같은 사건’이라며 의미를 평가했고 소비자들은 평소 다가가기 힘들었던 럭셔리 패션 하우스 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디자인한 옷을 싼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새벽부터 H&M 매장 밖에 줄지어 늘어서는 촌극을 벌였다.
그리고 매장 문이 열리자 20분도 안 된 시간에 사이즈와 컬러, 디자인 상관없이 무조건 매장 안 물건은 솔드 아웃 되고 이베이에서는 칼라거펠트+H&M 컬렉션이 뒷돈을 붙여 거래되는 등 하이엔드 디자이너의 이름이 갖는 놀라운 매출 파워는 가히 심한 열병 수준이었을 정도.
이후 스텔라매카트니, 빅터앤롤프, 로베트로까발리, 매슈윌리엄슨으로 이어지는 디자이너 콜래보레이션이 소개될 때 마다 H&M 매장 밖은 록 페스티발 현장을 연상시키는 담요 부대와 텐트 부대가 늘어섰고 H&M은 소비자들의 뜨거운 반응 속에 매출 구축의 짭짤한 재미를 즐겨왔다.
디자이너에 가려진 H&M의 슬픔 문제는 이 같은 디자이너 콜래보레이션이 지속적으로 진행되면서 정작 H&M의 자체 이미지는 디자이너 리미티드 에디션의 그늘에 가려진 듯한 묘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드라마 섹스앤더시티의 캐리 ‘슈즈’로 등장, 여성들의 욕망을 자극한 지미추가 H&M과 손잡고 리미티드 에디션을 내놓은 지난 10월 H&M의 전체 매출은 3% 하락, H&M을 당황케 했다.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지미추+H&M 리미티드 컬렉션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지만 H&M 자체 머천다이징의 매출이 이를 따르지 못한 것이다. (영국과 아일랜드의 19개 H&M 매장의 경우, 전날 저녁 5시 반부터 매장 앞에서 텐트를 치고 대기하는 젊은 여성들을 볼 수 있었고 매장 문이 9시에 열리자 순식간에 선반은 텅비게 되었다.)
H&M의 텃밭인 스칸디나비아와 유럽, 그리고 신규 시장인 아시아가 활발한 매출을 이뤄낸 반면 프랑스와 스페인 등은 매출 약세를 피하지 못했다. 글로벌 불황에 오히려 글로벌 마켓을 공격적으로 확대하고, 지미추 콜래보레이션 아이템이 매진 상태를 이룬 것을 감안하던 H&M의 실적은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하이엔드 디자이너와 하이스트리트의 만남이 시작될 때부터 일각에서 지적했던 디자이너 콜래보레이션의 한계, 즉 일시적 매출 상승을 기대할 수 있지만 회수가 거듭될수록 하이스트리트 업체 자체의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디자이너의 들러리 역할을 하게 되어 소비자 이탈이 유도될 수 있다는 우려가 현실화 되고 있다.
실제로 지미추가 처음 선보인 지미추 +H&M 남성복 컬렉션 역시 호평 속에서 매출 구축에 기여한 것을 감안하면 하이엔드 리미티드 에디션엔 고객이 몰리고, 자체 머천다이징은 소비자들에게 다가가지 못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 일부 고객들은 값싸고 트렌디한 H&M이라는 브랜드 보다 지미추의 네임 밸류를 찾아 H&M 매장을 찾은 고객들로 이들이 디자이너 충성 고객으로 성장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다양한 매체와 온라인을 통해 셀러브리티들의 패션에 익숙해진 여성들이 그간 디자이너들의 런웨이 디자인을 값싸게 카피, 판매하던 H&M의 간편성을 벗어나 디자이너들의 네임밸류를 느끼려는 욕망이 강해졌고, H&M은 그 기회를 값싸게 제공해 H&M 자체 머천다이징의 가치를 오히려 떨어뜨리는 부작용을 초래한 셈. 셀러브리티의 머스트해브 아이템인 지미추 스텔레토와 샌들을 50 달러 정도에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H&M과, H&M 자체 아이템을 50 달러 주고 구매하는 것은 가격 대비 그 효용도에 현저한 차이가 있다는 인식이 소비자들에게 생성되고 있다는 일부의 주장은 꽤 설득력이 있다.
물론 글로벌 불황으로 전체 어패럴 시장이 위축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하이엔드 디자이너에 묻어가는 깜짝 쇼 같은 디자이너 콜래보레이션이 익숙한 ‘습관’이 되면서 일부 디자이너들은 H&M이 기대하는 매출 구축 효과나 브랜드 이미지 업그레이드 효과는 약화되고 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따라서 H&M이 기존의 시장보다 신규 시장 확대에 노력하고 있는 것도 이 같은 ‘하이엔드 디자이너 효과’ 보다 H&M 자체가 갖고 있는 브랜드 이미지를 전파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했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이엔드 디자이너의 곡예 그렇다면 하이엔드 디자이너는 콜래보레이션의 절대적 승리자일까? 전문가들의 시선은 냉정하다. 셀러브리티의 레드 카펫에 즐겨 등장하며 충실한 고객층을 상대로 일종의 '매니아 브랜드‘로 자리해온 지미추를 다수의 변덕스런 고객에 노출시킨다는 것은 지미추의 입장에서도 위험한 곡예나 다름없다는 것이 이들의 지적이다.
H&M 매장에서 지미추의 콜래보레이션 제품이 매진 사태를 이뤘다고 해서 하이스트리트 마켓에 익숙한, 즉 쇼핑에 투자하는 자본이 한정된 다수의 소비자들이 당장 지미추의 충실한 고객으로 이동하는 것도 아니고 ‘셀러브리티, 패셔니스타들의 전유품’이라는 자부심을 즐겼던 기존의 고객들은 고가를 지불하며 구입했던 지미추가 대중적인 H&M 매장에서, 어이없는 가격으로 판매된다는 것에 일종의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다는 것. 물론 불황으로 럭셔리 시장이 올해 15% 정도 위축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는 상황에서 지미추가 콜래보레이션을 통해 추가 수익을 이뤄낸 것은 자금 확보 측면에서는 슬기로운 판단일 수 있다.
문제는 일단 H&M에서 기존 10분의 1 가격인 80 달러 정도만 지불하면 지미추 글래디에이터 슈즈를 구입할 수 있다는 ‘암시’를 주면서 지미추의 존립 기반인 ‘높은 크리에이티비티와 희소성’에 의문을 제기할 기회가 될 뿐 아니라 ‘탐내는 브랜드’라는 위상이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그간 지미추를 비롯한 럭셔리 브랜드의 디자인을 카피, 자본을 확보해온 H&M의 영토에 카피의 대상이었던 지미추가 스스로 발을 들임으로써 하이스트리트의 ‘디자인 카피’ 논란을 슬그머니 눈감아 주는 면도 없지 않다.
물론 초창기 칼라거펠트가 H&M과 제휴하면서, 더 많은 고객들에게 그의 크리에이티비 세계를 알려주고 싶다는 대외적 미덕을 발휘하고 실질적으로는 그 자신의 시그너쳐 라인에 대한 관심을 끌고 결국 토미힐피거 그룹에 매각할 기반을 마련 한 것처럼, 아디다스, H&M과 제휴한 스페셜 에디션을 통해 매출 구축에 성공, 부진했던 자신의 시그나쳐 라벨까지 흑자로 돌려놓은 스텔라매카트니와 같은 대중성을 높여 부진했던 자신의 시그너쳐 라벨까지 흑자로 올려놓은 셈이다.
은둔자적 브랜드로 마니아 중심으로 움직였던 빅터&롤프가 대중과 친해지고 궁금증을 자아내는 브랜드로 자리한 것처럼 말이다. 미국과 북미 시장을 노리던 로베르토까발 리가 H&M과의 제휴를 통해 미국 내 대중적 인지도를 상승키는 효과를 얻어냈듯 할리우드 셀러브리티와 돈 많은 스포츠 스타의 여자 친구, 상류층 여성들에 둘러 쌓여있던 지미추 역시 H&M과의 콜래보레이션을 통해 브랜드 위상을 재확인하고, 편한 자금 확보를 이뤄내는 동시에 새로운 시장에 대한 흥미를 구축할 기회가 되었을 수도 있다.
어찌 보면 이 모든 것은 요점을 벗어난 배부른 소리일는지 모른다. 하이엔드와 하이스트리트의 만남이 어느 편에 더 이득이 되든 디자이너 이름에 굶주린 절박하고 애처로운 소비자들에게 이 전략은 언제나 통하니까 말이다.
예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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