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탈리아 패션 하우스 베르사체(Versace)가 혹독한 체질개선에 돌입한다. 지난 달 초 기대에 부응하는 매출을 올리지 못했다며 1981년 이후 존속해왔던 일본 매장 정리를 선포, ‘외양’보다는 ‘내실’있는 경영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던 베르사체는 최근 글로벌 직원의 26%를 감축하는 대대적 인원 감축계획을 밝히며 구조조정의 강도를 높였다.
실제 2009년 베르사체의 적자는 4500만 달러로 예상되며 2011년까지 흑자 회복은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어서 유동자금 확보가 긴급한 문제로 지적되어 왔다. 다시 말해 럭셔리 브랜드의 상징이라 할 일본 시장에서 한 발을 빼고 350명에 달하는 인원 감축전을 펼치는 것도 결국 체질을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도나텔라의 위기는 곧 베르사체의 위기
1978년 지아니 베르사체가 밀라노 비아델라스피가에 첫 번째 매장을 오픈한 후 특유의 화려한 디자인과 과감한 컬러로 패션 지도의 큰 획을 그은 베르사체는 럭셔리 어패럴 외에도 액세서리, 향수, 화장품, 홈퍼니싱, 호텔 사업 등을 펼쳐왔다.
베르사체에 위기가 닥친 것은 1997년 창업자이자 디자이너였던 지아니베르사체가 피살되면서다. 그의 사망 이후 아무 준비 없이 디자인을 지휘하게 된 도나텔라 베르사체는 할리우드 스타들과의 커넥션을 적극 활용하는 직·간접 마케팅을 펼쳤지만 과도한 노출, 실생활과 거리가 먼 스타일을 치중하다 매출 부진을 겪었고 체계적이지 못한 방만한 경영까지 겹치면서 위기를 맞은 것.
스스로 인정하듯 지아니 베르사체의 ‘뮤즈’ 일 때의 도나텔라는 화려한 브랜드의 상징이었지만 패션사업을 운영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도나텔라 특유의 블링블링하고 화려한 스타일은 할리우드 스타의 레드카펫에서는 환영받았지만 일반 소비자와는 거리가 멀었고, 약물중독으로 재활원 입소와 퇴소를 반복할 정도로 심신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날카로운 전략적 판단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 결과 베르사체는 ‘white trash(천박한 백인 날라리)’를 위한 옷이라는 조롱 섞인 표현까지 듣게 되었을 정도. 실제로 2004년 전문경영인 지앙까를로디릿시오가 CEO로 영입될 당시, 베르사체의 부채는 1억4600만 달러에 달했다. 도나텔라는 코카인 중독 재활치료를 받고 전문 경영인 지안카를로디리시오를 영입, 자신은 경영에서 한발 물러선 후 브랜드 재정비에 나섰다.
패밀리 비즈니스의 한계
디자인에만 집중하게 된 그녀는 과도한 화려함을 드러내 입을 만한 컬렉션을 선보여 호평을 받았고 핸드백을 비롯한 가죽 액세서리 부문이 대활약을 펼치면서 추락했던 브랜드 인지도도 서서히 궤도를 찾기 시작했다.
베르사체 생환의 책임을 맡은 디릿시오는 즉시 불필요한 베르사체 가문의 개인 자산을 매각, 유동 자본을 마련하고 란제리와 아동복 등 수익성 낮은 라인은 정리했다. 또 뉴욕과 밀라노, 런던의 플래그십 매장에 집중하는 절약적 경영체제 구축을 근간으로 구조조정을 실행했다. 이와 함께 잠시 미뤄뒀던 남성 컬렉션과 주얼리, 고급 시계 부문에도 초점을 다시 맞춰 성장 동력을 마련하고 중국을 위시한 신흥시장에 매장을 오픈 추가 매출을 구축하고 람보르기니 스포츠카, 아우그스타 웨스트랜드 헬리콥터 등 브랜드 이미지 고양에 긍정적인 컬레보레이션을 진행하며 마침내 2006년 수익을 탈환, 베르사체의 위기는 해소국면에 접어든 듯 했다.
하지만 디릿시오가 투자비용이 높은 런웨이 무대에 집착하는 도나텔라에게 실제 고객을 타깃으로 한 트링크쇼로 대체할 것을 요구하며 알력이 시작되었고, 2008년 글로벌 불황으로 다시 수익이 감소하자 디롯시오가 전략적 투자를 고집하는 반면 도나텔라는 경비절감을 요구하며 갈등을 빚고 결국 디릿시오는 베르사체를 떠났다.
디릿시오에 이어 베르사체를 지휘하게 된 CEO 페라리스는 구찌, 질샌더 등을 거친 베테랑 럭셔리 전문가로 특히 럭셔리 제조/공급 체인 경험이 풍부한 인물이다. 도나텔라는 수익성 없는 매장을 폐쇄, 제조시설 통합, 아웃소싱 체제 구축 및 인원 절감을 내세운 신임 최고경영자 페라리스의 구조조정 계획안을 승인하며 적극 지원하는 체제를 갖춰 일단 베르사체의 2차 구조정은 본격 가동을 위한 출발선에 서 있다.
아시아 시장, 악세서리에 기대
CEO 지안지아코모페라리스의 의지는 확고하다. 베르사체의 생환 전략의 키를 쥐게 된 전문경영인 페라리스는 수익중심의 경영을 내세워 부진한 유통망은 대폭 정리하고 매출이 기대되는 시장의 유통망은 확대하는 전략을 시행, 불필요한 운영비는 절감하고 수익은 늘리는 알뜰 경영을 꾀하는 것. 동시에 베르사체를 트렌드를 리더하는 브랜드로 이미지를 구축하겠다는 야심도 드러내고 있다. 일각에서는 베르사체의 위기가 다양한 브랜드와 사업, 그리고 전문 경으로 무장된 LVMH으로 대변되는 멀티 럭셔리가 주도하는 럭셔리 업계에서 사업적 기술과 시야가 좁을 수밖에 없는 ‘패밀리 비즈니스’ 형 패션하우스라는 점이 근본적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화려함’을 내세웠던 베르사체의 이미지가 퇴화되고 있는 지금 베르사체가 가야할 곳은 ‘트렌드’를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경영체질을 바꾸고 ‘브랜드 이미지’ 자체를 새롭게 정비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주장이다.
동시에 제품을 구매하는 실질 구매자들을 유인할 수 있는 매력적인 가격을 제공하는 것도 구조조정과 함께 진행되어야 할 정책이라고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즉 비용 절감을 위한 타이트한 구조조정과 함께 신규 소비자를 유인할 수 있는 제품들을 추가하고, 가격적 유연성을 발휘하되 럭셔리 브랜드 특유의 위상을 손상시키지 않는 절충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 사실 글로벌 불황은 베르사체나 돌체&가바나, 로베르트까발리 등 노골적인 섹시미와 할리우드 스타의 레드 카펫용 가운 협찬에 주력했던 패션 업체들에게 ‘진짜 소비자와 소통하는 법’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했다.
경쟁적으로 셀러브리티와 인연을 과시하며 ‘화려한 치장’에 몰두했던 전략이 ‘실질적 매출’이 중시되는 불황기가 되면서 브랜드 충실도가 높은 고객이 배니티(vanity:허영) 마케팅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깨닫게 한 것.
메두사의 힘 발휘될까?
다행인 것은 미국을 비롯한 글로벌 럭셔리 소비자들이 서서히 지갑을 열기 시작하고, 많은 리테일러들은 여전히 베르사체의 매력을 믿고 있어 베르사체가 대책 없는 블링블링한 화려함을 털고, 소비자와 소통하는 컬렉션과 아이템을 구성한다면 브랜드의 매력이 다시 마법을 부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베르사체의 가장 큰 시장은 유럽 그리고 미국 순인데 디릿시오에 이어 페라리스 또한 아시아 시장 유통에 집중할 방침을 표명, 시장성 높은 아시아 시장이 건강한 베르사체를 위한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줄 전망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매혹적인 괴물, 메두사를 브랜드로 내세워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준 베르사체가 보는 이의 눈을 멀게 만드는 메두사처럼 다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브랜드로 명성을 되찾을 지는 결국 도나텔라와 페라리스가 이끄는 혹독한 체질 개선 -실용적 유통망 구축과 브랜드 이미지 재정립-에 달려 있다.
예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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