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글로벌 불황의 폭격이 몰아치면서 시작된 美 유통 업계의 가격 인하전이 패션하우스(및 디자이너)와 유통 매장간의 알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극심한 소비 심리 악화로 필수품이 아닌 고가의 어패럴 소비가 주춤하자 유명 백화점 업체들이 패션 업체에 반강제적인 ‘가격 인하’를 요구하면서 해당 백화점과 ‘유통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선 가격을 내릴 수밖에 없던 디자이너들이 이제 가격 인하가 매출 신장의 ‘비법’이 아니라 패션 브랜드의 위상과 장기적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고 지적하며 대항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디자이너와 유통업체 갈등 표면화
디자이너들은 삭스(Saks)나 블루밍데일스(Bloomingdales)이 경우 불황을 이유로 정가 판매를 시작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바로 ‘가격 인하’를 주문한다면서 브랜드에 대한 유통매장의 지배력이 지나치게 강대하다고 비판하고 나섰다. 또한 디자이너 브랜드의 주요 유통통로인 백화점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는 만큼 재고와 가격관리에 브랜드의 권한을 좀더 행사할 수 있는 ‘임대 매장’ 형식으로 거래 포맷을 바꾸려는 움직임도 감지되는 상황.
백화점과의 브랜드의 균열은 지난 가을 추수감사절 기간에 삭스피브스애버뉴와 라이벌 백화점들이 경쟁적으로 가격 인하전을 펼치면서 소비자들이 다시 지갑을 열었고, 단기 매출 재미를 본 백화점들이 ‘가격 인하 전략’을 지속적으로 이어가면서 소비자들이 더 이상 브랜드에 대한 정가 지급을 ‘부당하게’ 느끼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표면화되었다.
쇼핑객들이 ‘불황을 맞아’ 오히려 평소 부담스런 가격대의 디자이너 및 럭셔리 브랜드들을 ‘한층 편한’ 가격으로 구입하게 되면서 ‘정가 제품’의 매출은 물론 브랜드 이미지 자체에도 부정적 영향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지난 가을 삭스 매장에서는 1200달러짜리 피아짜셈피오네(Piazza Sempione) 드레스가 정가의 1/4에 불과한 300달러에 팔릴 정도로 백화점간의 ‘하이엔드 브랜드 가격 인하’전은 극단적으로 치달았다.
그 결과 소비자들은 하이엔드 브랜드의 본 매장에서 조차 할인을 당연시하고 그동안 ‘당연시 여겼던’ 하이엔드 브랜드들의 ‘높은 가격’에 대해 불만의 소리를 내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심지어 엄격한 ‘가격 판매규정’을 갖고 있는 프랑스에서 조차 불황을 이유로 ‘자율적인 할인판매’를 허용했고, 美 백화점들은 정기적인 시즌 세일 뿐 아니라 이런 저런 이유를 달며 디자이너 브랜드의 출혈 할인 판매를 당연시했을 정도.).
이처럼 기존의 브랜드 ‘기격 책정 규정’의 기반이 흔들리고 브랜드 이미지에 금이 가기 시작하자 디자이너 및 패션하우스들이 백화점이 가격 인하전략에 제동을 걸기 시작한 것은 당연 일이다. 무엇보다 소비자들-심지어 돈 많은 열혈 고객들조차 -하이엔드 브랜드들이 주장하는 ‘가격’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제값 다주고 구입=바가지 쓰는 것’이라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은 패션하우스의 존립자체를 뒤흔들 수 있는 위험한 신호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즉 할인을 하지 않았다면 하이엔드 브랜드를 구입할 수 없던 소비자들이 고객으로 흡수되면서 기존의 충실한 고객들은 그들만의 영역을 침범당하는 느낌을 받았고, 그동안 정가로 구입했던 자신의 행위에 씁쓸함을 갖게 되었다는 것. 그 결과 충실한 고객들이 오히려 해당 브랜드에서 떨어져나가는 최악의 상황까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하이엔드 업계가 백화점의 할인전을 ‘거부하고’ 나선 이유다.
다시 말해 백화점들이 무차별 할인전을 펼치면서 ‘충실한 고객’ 중심으로 안정적인 매출을 일궈왔던 하이엔드 브랜드들이 갑작스런 ‘뜨내기 할인 손님’으로 인해 기존의 고객의 이탈을 경험하게 된 것.
일시적 매출을 중시하는 ‘백화점’과 달리 고정고객을 기반으로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매출 구축을 추구하는 하이엔드 패션하우스들에게 ‘정규 고객’의 불신과 이탈은 장기적 매출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본 매장에서는 ‘정가’ 판매를 하고 있는데 백화점에서 세일전을 펼치면서, 정가에 구입한 고객들이 본 매장에 항의하는 상황이 빈발하고 있다.
패션하우스들의 제 목소리 내기
패션하우스들은 지난해부터 시작된 백화점의 ‘할인 폭격전’이 지난 인터넷 할인 호텔/티텟 사이트들의 무차별 할인전으로 항공사와 호텔 업체들이 피해를 입었던 상황과 비슷하다고 보고 있다.
당시 웹사이트들이 항공권과 호텔룸을 다량으로 구입한 뒤 웹사이트를 통해 ‘할인 경쟁전’을 펼치면서 정상적인 ‘항공권과 예약’ 관행의 기반이 흔들리자 업계는 부당한 할인판매를 하는 웹사이트들과는 거래를 ‘제약’하고 적정한 규제를 받아들이는 업체에게는 ‘우호적인 파트너’ 관계를 구축, 무질서해지던 가격 인하 붐을 조정한 바 있다.
일례로 구찌 그룹은 지난해 11월 미 백화점들의 ‘무차별 가격 인하전’이 재발하지 않도록 보테가베네타, 입셍로랑, 구찌 등 산하 브랜드들이 ‘어떤 유통 통로에서도 동일한 가격을 유지하도록’ 철저한 관리 체제에 돌입했다.
즉 본 매장은 ‘정가’ 판매를 하는데 ‘백화점’은 세일을 하거나 할인폭이 유통 통로마다 차이가 생기지 않도록 ‘가격의 동일성’을 유지하겠다는 것으로 백화점의 강제적인 할인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점을 명백히 한 것이다. 한 마디로 브랜드가 백화점 측에 제품의 가격에 대한 권한을 행사하겠다는 선전포고를 한 셈이다.
이 같은 패션하우스들의 주장에 대해 ‘무자비한 가격 인하전’을 주도했던 삭스피브스애버뉴는 즉각적인 반응을 피했지만 최근 진행된 할인전에 구찌, 까르띠에, 샤넬, 로로피아나, 오스카드라렌타, 제냐, 크리스챤루브탱 등 40여개의 하이엔드 브랜드들의 이름이 빠져있어 패션하우스들의 목소리 내기가 나름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들 브랜드들은 문자 그대로 ‘백화점의 위상’과 연결되는 고가의 브랜드이자 충실한 고객을 배경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힘 있는 패션하우스들이지만, 백화점을 주요 유통망으로 활용하고 있는 대다수의 디자이너들은 백화점의 ‘세일 요구’에 대 놓고 반박하기 힘든 위치에 서 있다.
백화점 의존도 줄이고 자체 매장 구축
어찌 보면 글로벌 불황으로 촉발된 백화점의 ‘브랜드 가격 옥죄기’ 전략은 디자이너들에게 ‘자체 유통망’을 구축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많은 디자이너 및 패션 브랜드들은 백화점에 의존하는 유통 체계를 차츰 ‘자체 매장’ 구축 쪽으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아니면 백화점에 인스토어 부띠끄를 오픈, 백화점을 찾는 고객들의 발길은 유인하되 가격을 비롯, 운영 체제에 독립성을 보장받는 방법도 ‘백화점’의 입김을 줄이려는 패션하우스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이다.
이 같은 ‘인스토어 부띠끄’는 LVMH 산하 루이비통이 수년 전부터 해오던 방식으로 루이비통 부띠끄에서 일하는 직원 또한 백화점이 아닌 ‘루이비통의 직원’ 신분이다. 삭스와 나이만마커스에 위치한 루이비통이 대표적인 예.
당연히 루이비통은 지난해 11월 삭스와 나이만마커스가 진행한 ‘브랜드 세일전’에 참여하지 않았고 매출은 오히려 10%나 증가했다. 하지만 당장 유동 자본 부족으로 자체 유통망 확장이 힘겨운 디자이너들은 일단 ‘고객 반응이 적은 제품은 즉각 할인에 동참하되 잘 팔리는 제품은 신제품이 출시되어도 정가에 판매하는’ 선택적인 할인 정책을 제시하며 백화점과의 마찰을 줄이는 모습이다.
동시에 시간과 공간에 제약이 적은 온라인을 적극적인 유통망으로 개척, 매출에 탄력을 더하는 등 테크놀로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태도도 눈에 띤다.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는다고 했던가? 글로벌 경기 침체가 오히려 패션하우스와 디자이너들에게 ‘자체 유통망’ 구축의 필요성과 유통망 다양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하고 있으니 어두운 글로벌 불황을 견뎌내고 나면 디자이너들은 한층 더 독립적이고 강한 모습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 전에 ‘살아남아야 한다’는 명제가 충족되어야 하지만 말이다.
예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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