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 밀라노 패션 주간이 화려한 막을 올렸지만 침울한 글로벌 경기 상황으로 이탈리아 패션계의 현재 상황은 매우 뒤숭숭한 분위기다.
경제성과 실효성을 이유로 많은 디자이너들이 런웨이를 포기하면서 지난해 95개에 달했던 공식 런웨이 무대는 올해 79개로 감소, 긴축재정에 돌입한 패션계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밀라노 런웨이를 채운 컬렉션의 분위기 또한 뉴욕패션 주간과 매우 닮아 1980년대 풍 복고 스타일-강한 어깨와 가는 허리-이 지배적이어서 불황을 헤치고 살아남겠다는 의지가 ‘강한 여성’의 이미지로 투영된 느낌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강조된 어깨나 남성적인 수트보다는 페미닌한 감성을 덧칠, 여성미를 살린 파워 수트가 ‘현실성과 시장성’을 충분히 반영한 느낌이었고 겨울 컬렉션의 실루엣 또한 상의는 와이드하게, 하의는 수퍼 타이트하게 진행되어 대륙별 패션주간의 색깔 차이가 점점 좁혀드는 인상을 준다.
침울한 밀라노 패션 주간
여기서 주목할 점은 런웨이 무대에 오른 패션하우스나 디자이너들의 컬렉션 분위기가 아니라 이탈리아 패션계에 불어 닥친 위기의식이 밀라노 패션 주간에 고스란히 표출되었다는 점이다.
지난 1월 진행된 남성복 주간(A/W 2009/10 Menswear Fashion Week)에 참가했던 디자이너의 런웨이 무대가 20% 감소한 것과 비교하면 79개의 런웨이 무대가 펼쳐진 여성복 주간은 그나마 선전한 편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바이어와 리테일러들이 최소량의 물량만 최대한 까다롭게 구매 의사를 밝히고, 일부 바이어들은 아예 참관할 런웨이 무대마저 최소화하여 화려해야 할 패션 주간이 ‘불황에 위축된 패션계의 모습’을 전달하는 전시회 같은 느낌을 줄 정도.
그나마 조르지오아르마니, 구찌, 펜디, 베르사체, 모스키노 등 빅 패션하우스들이 런웨이 무대를 지키며 밀라노 패션 주간의 자존심을 살려주고 있지만 신선함과 이슈를 더해줄 작은 패션하우스들은 경비부담을 이유로 참가를 포기, 글로벌 불황에 몸을 사리는 패션계의 흐름이 고스란히 엿보였다.
실제로 지난 2002년 레디투웨어 라인을 론칭한 란제리 브랜드 라뻬를라(La Perla)는 밀라노 패션 주간 불참 사유를 ‘전략적 판단’라는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둘러댔지만 대다수의 업체들은 예산절감 및 유동자본 압박으로 런웨이 불참을 선택했다고 순순히 인정, 글로벌 경기 불황으로 위축된 패션계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감지되었다.
긴장과 혼돈에 휩싸인 이탈리아 패션계
사실 글로벌 금융 위기가 닥치기 이전부터 이탈리아 어패럴 업계는 값싼 노동력과 생산능력을 무기로 국제 텍스타일/어패럴 제조업계를 파고든 중국과 아시아 국가들의 시장 잠식으로 위기감을 느껴왔다.
아르마니나 베르사체 등 유명 패션하우스를 보유하고 있는 패션 국가이자 높은 품질을 자랑하는 텍스타일/어패럴 제조 및 수출 국가라는 이탈리아 패션계의 자부심은 값싼 노동력과 대량 생산체제로 무장한 아시아 어패럴업체들의 물량공세 앞에서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소규모 가족 비즈니스 형태로 어패럴 제조업을 이어왔던 많은 업체들은 경쟁에 폐업을 하거나 뿔뿔이 흩어지는 현상도 증가했다.
이런 와중에 글로벌 금융 불황이 심화로 럭셔리 어패럴 및 액세서리 수요가 급감, 이탈리아 제조업체는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단계까지 몰리게 된 것. 이를 반영하듯 이탈리아 패션계의 올 예상 수익은 전년대비 5% 떨어진 794억8000 달러로 예상된다.
이탈리아는 유럽공동체의 텍스타일과 의류업의 20-25%를 차지하는 어패럴 제조/수출/수입국이자 어패럴 관련업체 근무자만 50만 명이 넘는 산업구조상, 어패럴 업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클 수밖에 없는데 글로벌 금융위기 촉발 이후 주문이 급감하고 수출 길이 대폭 축소되면서 위기감은 고조될 수 밖에 없다.
이에 따라 텍스타일, 슈즈, 아이글래스, 가죽 등 업계의 대표자 및 패션 관계자들은 이미 지난 12월 어패럴 노조회의를 긴급 소집, 베를루스코니 수상에게 글로벌 금융위기의 영향을 최소화시킬 처방을 요구하면서, 글로벌 금융위기가 장기화되면 이탈리아 패션계는 물론 경제 전체가 큰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실제로 이탈리아는 텍스타일 수입과 관련된 업체만 6만여 곳이 넘고 2008년 1월-7월까지 213억2000만 달러 상당의 의류를 수출한 어패럴 사업 의존도가 높아 글로벌 어패럴 업계의 파산과 매출급락, 인원감축이 줄을 잇고 있는 현 상황에 민감히 반응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 섬유/의류 단체 시스테마모다 이탈리아(Sistema Moda Italia). 와 패션성(National Chamber of Fashion), ITFD(이탈리아 텍스타일/패션연맹)는 정부가 자동차 업계 뿐 아니라 어패럴 업계에도 긴급 자금 지원을 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나섰다.
이들은 이탈리아 정부가 밝힌 경기 부양책이 어패럴 업계에 대한 지원은 쏙 빼고 자동차와 가전제품 부문에 252억 달러의 자금을 지원하는 내용에 실망감을 드러냈고, 특히 정부 자금 지원 대상에 어패럴 부문이 제외되고 가구 업체가 포함된 것을 납득할 수 없다는데 한 목소리를 냈다.
이처럼 어패럴 업계의 불만이 높아지자 이탈리아 정부는 “Made in Italy" 제조업체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겠다며 성난 패션계를 달래는 모습.
제조업체들, 도산 공포
물론 이런 상황 속에서도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뉴욕 패션 5번가에 4000m² 규모의 대규모 콘셉 매장을 오픈하고, 로베르토까발리는 파리의 쉬크한 패션가 포브르생또노레에 5층 규모 매장 계획을 발표하며 이탈리아 패션 파워를 과시하고 있지만 텍스타일 수입과 어패럴/액세서리/슈즈 제조업에 의지하는 이탈리아 어패럴 업계의 실질적 위기감은 몇 디자이너나 패션하우스들의 화려한 성장보다 훨씬 절박하다.
이런 와중에 이탈리아 유수의 패션 그룹 IT Holding의 럭셔리 제조 유닛으로 VJC 베르사체, 베르사체스포츠, 져스트까발리 등 탑엔드 브랜드의 라이선스 제조업체로 활약해온 이띠에르(Ittierre)가 파산신청에 돌입하면서 업계의 불안감은 더욱 고조되고 있다.
특히 이띠에르가 라이선스 대금을 지불하지 못할 정도로 압박에 시달리다 이탈리아 정부에 파산보호 신청을 한 것으로 알려져 이탈리아 제조업체들의 줄 도산 및 패션하우스들의 제조/유통에 균열마저 예상되는 상황. 이를 반영하듯 밀라노 패션 주간에 진행될 예정이던 ‘져스트까발리’의 무대 스케쥴은 이띠에르의 파산으로 매장에서 소규모 프리젠테이션으로 대체되었고, 져스트까발리 라인의 생산이 순탄하게 지속될 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듯하다.
게다가 이띠에르가 IT 홀딩의 전체 수익 중 60%를 담당해왔던 것을 감안하면 현재 3억 8000만 달러에 달하는 부채에 시달리는 IT 홀딩의 불안은 가중되어, 도산까지도 우려되는 상황이다. 현재 IT 홀딩은 중국 업체 Mensun의 매각 제의와 투자 업체 Hardt Group의 디비젼, Kingsbridge Capital의 지분 및 채권 인수 제안을 놓고 선택을 고민하고 있다는 후문. 이띠에르가 파산신청에 들어가면서 모기업 IT 홀딩의 주식거래는 매매가 정지된 상태다.
갈 길은 멀고 답은 없고…
문제는 이탈리아 패션계가 직면한 위기감을 해소시킬 뾰족한 수단이 당장에 없다는 점이다. 한편으로는 시장을 파고든 아시아 어패럴 업체들과 힘겨운 시장 경쟁을 벌이고 다른 쪽으로는 주문 감소로 심화되는 유동 자본 압박을 해소해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는 이탈리아 패션계의 현 상황은 럭셔리 패션하우스의 본고장이자 장인정신의 산실이라는 자부심으로 버티기에는 너무나 힘겨운 현실이다.
예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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