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능 있는 신진 디자이너를 선택하는 리얼리티 쇼 ‘프로젝트 런웨이’ 한국판이 패셔니스타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가운데, 글로벌 디자이너들의 크리에이티비티의 전시장이자 패션 동향을 한 눈에 살필 수 있던 런웨이 무대는 점점 그 존재감이 축소되고 있어 쓸쓸한 마음을 자아낸다.
지난해 9월 「빅터&롤프」가 파리패션주간 참석을 포기하고 암스테르담 스튜디오에서 트렁크 쇼를 펼친 후 ‘www.viktor-rolf.com’을 통한 온라인 프리젠테이션을 진행했을 때만 해도 런웨이 쇼 불참을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 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관록있는 디자이너 「베라 왕」과 「벳시 존슨」이 뉴욕패션주간(2월 13일~2월 20일) 공식 런웨이 무대 불참을 선언하고 랄프 로렌, 프로엔자 스콜러, 캘빈 클라인, 마크 제이콥스, 카르멘 마크 발보, 루카루카 등이 런웨이 불참 대열에 줄줄이 동참하고 나서자 의상부터 메이크업, 진행 등 기본 10만 달러 이상이 투자되는 런웨이 무대의 실효성에 대한 의구심이 패션계에 확산되고 있다.
실제로 빅터&롤프가 파리패션주간 불참을 선언한 작년 9월은 미국의 대표적 투자사였던 리만 브라더스가 파산하고 미국 정부가 7000억 달러의 구제 금융 계획을 밝힌 시점과 일치, 일찌감치 현금 확보에 나선 빅터&롤프의 빠른 판단력을 엿볼 수 있었다.
몸집은 비대, 기대 효과는 낮아진 패션주간
대규모 비용이 투자되는 런웨이쇼가 디자이너들에게 부담을 준 것은 비단 최근의 현상은 아니다. 1990년대 후반 아시아 시장을 강타한 금융 위기와 2001년 9/11 사태, 미-이라크 전쟁 발발이 글로벌 매출 부진으로 이어지자 샤넬과 디올 등 패션하우스들은 런웨이 무대를 대폭 축소했고, 베르사체는 아예 패션쇼 자체를 포기하고 극소수의 에디터와 고객을 상대로 트렁크 쇼를 펼치며 런웨이 의존도를 낮춘 바 있다.
하지만 글로벌 바이어와 리테일러, 패션 에디터들에게 자신의 디자인 세계를 보여주고 글로벌 인지도를 높일 수 있다는 매력 앞에서 많은 디자이너들은 자신의 위상을 보여주고 동시에 패션계 인맥형성을 가능케 해주는 런웨이 무대를 포기하기 힘든 것이 사실. 실제로 국내 패션계만 해도 파리/런던/밀라노/뉴욕 패션주간에 참석, 런웨이 컬렉션 쇼를 펼쳤다는 ‘사실’이 디자이너의 실력과 파워를 가늠하는 측정자로 자리하고 있는 현실이다.
하지만 2008년 9월 72개의 런웨이 쇼가 펼쳐졌던 뉴욕 패션주간의 공식 무대 수가 올 2월에는 62개로 대폭 축소되고 파리나 밀라노, 런던 패션주간도 런웨이 무대를 포기하는 디자이너들이 늘고 있어 당장의 현금 확보가 급한 디자이너들에게 런웨이는 더 이상 매력적인 ‘소통 수단’이 되지 못하는 느낌이다.
특히 럭셔리의 대명사 샤넬이 인원 감축을 진행하고 LVMH, 구찌가 몸을 사리는가 하면 「빌 블래스(Bill Blass)」 같은 패션 라벨들이 시장 악화를 빌미로 매장 문을 닫고 있는 판국에 화려한 겉모습과 달리 실질적 리테일링 효과가 떨어지는 런웨이 쇼의 효율성에 회의가 생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공동 런웨이 쇼·온라인 프리젠테이션으로 전환
사실 20세기 초만 해도 미국의 런웨이 쇼는 파리 꾸튀리에들의 디자인을 카피한 최신 패션을 쇼 케이스 하는 현장으로 활용되는 정도의 소규모 행사에 불과, 일반 대중들에게는 그 의미가 미미했다. 하지만 1990년대 슈퍼모델이 등장하고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패션디자이너와 그의 컬렉션이 만나는 런웨이 무대의 마케팅적 가치가 높아지고, 글로벌 바이어와 리테일러의 주문을 수주하는 통로이자 유명 패션 에디터들과 접촉하는 현장이 되면서 그 효용성과 규모가 점점 더 커졌다.
흥미로운 점은 런웨이 쇼의 비용 대비 효과에 의구심을 품는 디자이너들이 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디터들과 바이어들은 여러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만나고 평가할 수 있는 패션주간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나 인지도가 낮은 신진 디자이너는 비용 부담에 허리가 휘더라도 글로벌 눈도장을 받을 수 있는 런웨이 무대를 포기하긴 힘들다.
즉 과감하게 런웨이 불참을 선언하고 트렁크 쇼를 펼칠 수 있으려면 그만큼 디자이너의 인지도가 높아야 된다는 말로 어떻게든 치열한 시장에 진입해야 하는 신진 디자이너에게는 자신의 얼굴을 알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인 런웨이 무대 포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
하지만 런웨이 쇼를 통한 인지도 구축이라는 마케팅 효과가 반드시 실질적 매출 구축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서 런웨이 무대의 ‘마케팅’ 효과가 과장되어 있다는 지적도 점점 늘고 있다.
이들은 런웨이쇼가 소비자와의 소통이나 매출 구축이 아닌 패션 에디터와 바이어들의 영향력을 과시하는 현장으로 변질되었고, 최근에는 합법적인 디자인 카피의 창구로 역할이 더 커졌다면서 더 많은 디자이너가 덜 부담스럽게 참석할 수 있도록 런웨이 구성 비용과 규모를 축소시키는 편히 패션주간 본연의 목적에 더 부합된다고 지적한다.
또한 실질적인 패션 시장 경험이 부족한 신진 디자이너들은 재정적으로뿐 아니라 ‘디자인성’ 자체도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라서 무리한 런웨이 쇼를 펼치는 것보다는 적절한 아이템으로 적절한 컬렉션을 구성, 실질적 반응을 경험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 런웨이 쇼의 ‘과장된 효과’를 지적하는 측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글로벌 불황의 영향으로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밀라노/런던/파리/뉴욕 패션주간의 대안으로 디자이너가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은 어떤 것이 있을까?
패션계에 얼굴을 알리고 인지도를 구축해야 하는 신진 디자이너들은 런웨이 쇼의 매력을 놓치기는 힘들다. 따라서 최근에는 몇몇 디자이너들이 하나의 무대를 동시에 꾸미거나 컬렉션에 포함되는 의상의 수를 줄여 투자비용을 줄이는 방안이 시도되고 있다.
실제로 뉴욕 패션주간에 참석하는 마라 호프만, 니콜라스 K, 세르지오 다빌라 등은 브라이언 파크에 공동 런웨이를 구성, 경비를 절감했는데 이 같은 ‘협업적 런웨이 구성’은 경비절감 효과 뿐 아니라 세 라벨들의 핵심 아이템이 연속적으로 무대에 오르면서 쇼와 쇼 사이에 발생되던 불필요한 시간 낭비가 줄어드는 부가적 효과도 발생했다.
인터넷을 활용한 온라인 프리젠테이션을 진행하는 것도 런웨이 무대의 대안으로 선택되는 좋은 방법이다.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소규모 트렁크 쇼를 진행한 뒤 각 패션주간에 맞춰 온 웹사이트를 통해 컬렉션 영상을 내보낼 경우 10만 달러 이상의 경비 절감 효과가 발생할 뿐 아니라 공간·시간적 제약 없이 글로벌 패셔니스타 및 바이어들과 접촉할 수 있어 그 효과가 상당하다고.
실제로 영국 디자이너 앨리스 템펄리는 밀라노/파리/뉴욕/런던 패션주간에 맞춰 온라인 프리젠테이션을 절약했고 패션주간 런웨이 무대를 포기하진 않더라도 온라인 패션쇼 프리젠테이션을 진행하는 디자이너와 브랜드는 점점 늘고 있다.
TV 노출 혹은 셀러브리티 마케팅
하지만 런웨이 쇼를 진행하지 않고도 강력한 인지도와 매출을 동시에 구축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안은 바로 TV 드라마에 의상을 등장시키는 방법이다. 할리우드 스타들의 파파라치 사진에 등장한 패션 브랜드가 곧바로 패셔니스타들의 머스트해브 아이템이 되면서 많은 디자이너들은 할리우드 스타를 통한 마케팅을 진행하고 가수나 영화로 유명세를 얻은 스타들이 아예 자신의 패션 라벨을 론칭, 곧바로 디자이너 (혹은 패션 사업가)로 데뷔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
가장 성공한 셀러브리티 라벨로 꼽히는 제니퍼 로페즈의 「JLo」로 대박을 친 이후 뉴욕 패션주간에 하이엔드 라인 스윗페이스(Sweetface) 런웨이를 구성했는가 하면 할리우드 여배우들의 머스트해브 아이템이 된 로고 트레이닝으로 승승가도를 달리고 있는 「쥬시 꾸튀르」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 출연 이후 마니아 브랜드에서 글로벌 여성들의 머스트해브 아이템으로 자리한 「루부탱」 「지미추」 또한 TV의 마케팅 효과를 가장 잘 보여준 사례가 된다.
그런가 하면 무명 디자이너 에비게일 로릭은 패션에 TV 드라마 가십걸에 등장한 가상의 패션 라벨 ‘엘리노어 월도프(Eleanor Waldorf)’의 의상을 디자인하며 유명세를 얻은 후 2007년 봄 자신의 컬렉션을 론칭, 탄탄한 매출을 구축한 데 이어 2008년에는 뉴욕 패션주간에 참석하는 등 성공적인 디자이너 인생을 이어가고 있다.
물론 TV를 동원한 셀러브리티 마케팅 효과는 극소수의 ‘운 좋은’ 사람들에게 제한된 일이지만 전통적인 런웨이 무대보다 인지도와 매출 구축효과가 더 뛰어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이제 시대는 변했고, 불필요하게 비대하고 소화력이 약해진 런웨이 무대가 다이어트에 돌입할 시점인 것만은 확실하다.
예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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