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패션에 중독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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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0 오후 8:39:49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급진적 자본주의 체제가 도입되면서 재빨리 자본주의를 받아들여 부를 축척한 사람들이 늘면서 러시아가 서구 패션 브랜드들의 매출 노다지로 자리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더 이상 러시아 소비자들이 서구 패션 브랜드의 수동적 흡수에 만족하지 않고 패션에 대한 즐거움과 지식을 갖추게 되면서 서구 패션에 익숙한 세대를 중심으로 자신의 독특한 개성과 서구 패션을 러시아적으로 재해석한 디자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탄탄한 자본과 러시아 디자이너라는 독특한 매력을 바탕으로 러시아 국내는 물론 서구 패션계에 얼굴을 내밀면서 패션 지도에 러시아의 영역을 조금씩 확대하고 있다. 풍부한 자본과 패션에 대한 열정, 그리고 러시아 디자이너라는 이국적인 타이틀로 시장성을 확보하고 있는 이들 디자이너는 러시아의 미래 패션에 대한 긍정적 신호이자, 러시아를 단순히 매출창구로 여기는 일부 패션 브랜드들을 긴장시키는 신호탄이다.


자라나는 러시아 디자이너들

지난 5월 2일 뉴욕 소호 지구에 첫 번째 매장을 오픈한 키라플래스티나(Kira Plastinina)는 할리우드가 주목하고 있을 정도로 유명세가 높은 러시아 디자이너로 이제 겨우 15살에 불과하지만, 여자라면 누구나 꿈꾸었을 법한 매력적인 드레스와 액세서리로 탄탄한 지명도를 쌓고 있다.

러시아의 패리스힐튼이라고 할 만큼 매력적인 외모에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속이 비치는 감각적인 드레스와 블랙투투, 소녀적인 핑크 액세서리로 러시아 소녀들의 우상으로 떠올랐고, 뉴욕에 매장을 오픈할 때는 할리우드 스타들과 방송매체가 몰려들었을 정도로 지명도가 높다.

어찌 보면 러시아판 패리스힐튼을 떠올리게 되지만 소녀적 감성과 디자인 지식, 그리고 옷 입는 즐거움을 배가시키는 다양한 아이템으로 구성된 그녀의 컬렉션은 할리우드 스타들에게 일찌감치 눈도장을 받았을 정도.

반면 과거 러시아 연방, 우크라이나 출신의 디자이너 베로니카진비(Veronika Jeanvie)는 파코라반과 손잡고 미국 시장에 데뷔 컬렉션을 선보였고 알렉산더 테레코프(Alexander Terekhov)는 뉴욕 패션 주간에 4번이나 참가하며 인지도를 넓히고 있다.

이밖에 발렌틴유다쉬킨(Valentin Yudashkin) 데니스시마체프(Denis Simachev) 이고르샤푸린(Igor Chapurin) 등은 러시아 국내에서 얻은 탄탄한 기반을 바탕으로 유럽에 컬렉션을 소개하며 서구 패션계에 조금씩 얼굴을 내밀고 있다.

1991년 파리 패션 주간에 초대받으며 이름을 얼굴을 익히기 시작한 유다쉬킨은 러시아 제정시대, 황제를 위해 제작되었던 페바르제(Faberge)가 달걀을 연상시키는 드레스를 통해 파리하이패션조합(Syndicate of High Fashion)에 러시아 디자이너 최초로 이름을 올렸다.

또한 이고르샤푸린은 2002년 파리에서 개최된 니나리치 선정, 젊은 디자이너 상을 수상한 인물로 정통 테일러드 정신과 페미닌한 감성을 조화시킨 의상으로 주목 받고 있다. 반면 데니스시마체프는 밀라노 패션 주간에 참석, 아방가르드한 스트릿 스타일을 선보이며 눈길을 끌었다.

이처럼 러시아 디자이너들이 서구 패션가에 모습을 내밀고 있는 것은 시장개방 이후 부를 축척한 러시아인들이 많아지고, 패션이 생활에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면서 패션에 대한 재정적 지원이 풍부해졌기 때문이다. 즉 많은 비용이 투자되는 패션 주간에 컬렉션을 선보일 수 있을 정도로 재정이 탄탄해졌다는 것.

동시에 러시아 디자이너에 대한 호기심과 시장성을 갖고 있는 서구 패션 시장에 보이기 진출, 서구 패션가에 이름을 알리고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는 러시아 어패럴 시장에서 자신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판단도 한몫 했다.

러시아 국내에도 많은 패션주간이 있지만 이곳을 찾는 외국 바이어나 패션 기자들은 상대적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어 보다 많은 매스컴의 취재와 투자자들이 몰리는 파리나 밀란, 뉴욕 패션 주간을 찾아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러시아 국내 시장 주도와 해외 시장 선점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전략을 펼치는 것이다.

테레코프는 매 시즌 뉴욕 패션 주간에 유려한 실루엣과 페미닌한 아름다움을 담은 자신의 라벨, 테렉소프(Terexov) 컬렉션을 선보여 필립림과 종종 비견되곤 한다. 올 가을 짙은 빨강 브이넥 가운과 러플 장식 칵테일 드레스, 허리에 벨트가 달린 실버 다운 코트를 선보였고 나이만마커스나 바니스뉴욕 버이어들의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아직까지 대형 백화점 매점의 주문을 받지는 못한 상태. 미국 바이어들은 러시아 디자이너의 잠재성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의 매출 구축력은 여전히 확인해야 할 상태라면서 시즌별로 지속적이면서 안정적인 컬렉션을 선보여 바이어들에게 신뢰감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이런 면에서 매 시즌 뉴욕 패션 주간에 꾸준히 런웨이 무대를 올리는 테레코프의 시장 접근법이 좋은 결과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해도 좋을 듯.


시장의 신뢰, 브랜드 인지도 구축이 관건

서구 패션계 진출을 노리는 러시아 디자이너들이 고민하는 또 다른 문제는 브랜드 인지도와 경쟁능력이다. 러시아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기 위해 서구 패션 브랜드가 러시아에 패션 폭격을 내리고 있는 반면, 서구 소비자들에게 러시아 패션은 너무 화려하고 요란하다는 인식이 심어져 있다. 따라서 이국적인 러시아 디자이너라는 타이틀로는 인지도 높은 서구 패션 브랜드와 소비자 흡인력 면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이런 점 때문에 베로니카진비는 파로라반이라는 유명 디자이너와 손잡고 LA 패션 주간에 참석, 그의 인지도를 바탕으로 미국 소비자들에게 이름 알리기에 나섰지만 그녀가 선보인 네온블루/그린 컬러의 칵테일 드레스나 캣수트는 미국 소비자들의 선뜻 구매하기 힘들다는 평가를 받았다. 즉 미국 소비자를 사로잡을 만한 ‘통하는’ 디자인을 선보이는 것이 유명 디자이너를 대동하는 것보다 선행되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처럼 러시아 디자이너들이 당장 미국이나 유럽 시장에 매출을 구축하진 못하고 있지만 러시아 국내에서는 톡톡한 이름값을 하고 있다. 한동안 서구 패션에 심취해 있던 러시아 소비자들이 자국 디자이너들에게 관심을 쏟기 시작했고, 특히 부띠끄 수준의 어패럴 매출은 급격히 향상되고 있다.

2007년 러시아의 의류/풋웨어/액세서리 매출은 633억 달러였고 2010년에는 이보다 10%가 증가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그리고 이 같은 어패럴 시장의 확대에 패션 소비국으로서가 아니라 패션 창조국으로서의 러시아의 기반을 다져가고 있는 러시아 디자이너들의 노력이 큰 몫을 하고 있다.

비록 아직은 미국 바이어들의 주문을 성사시키진 못했지만 테레코프가 계속 뉴욕에 머물고 있는 이유도 미국 시장과 소비자들에 대해 좀더 많은 정보를 확보하고 패션의 흐름을 이해해 성공적인 미국 시장 진출을 이뤄내기 위한 것도 있지만 러시아 패션 시장에서 그의 입지를 더욱 강화시키기 위한 것 또한 그의 뉴욕행을 자극하는 중요한 요인이다(테레코프는 모스크바에 자신의 매장을 갖고 있다).

반면 할리우드 배우급 외모와 부호 아빠를 둔 10대 디자이너 키라플래스티나는 소호 매장에 만족하지 않고 LA와 뉴욕에 12개 정도의 매장을 추가 오픈하고, 3년간 미국 내 매장수를 50여개로 늘릴 예정이어서 현재 가장 ‘잘 나가는’ 미국 내 러시아 디자이너로 자리한 모습이다.

그녀의 패션 체인은 H&M이나 포에버 21처럼 값싸고 트렌디한 스트릿웨어로 구성되어 있으며 러시아 소녀들 사이에서 열광적인 반응을 얻어냈고, 현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40개 매장이 운영 중이다.

전문가들은 부담없는 가격과 트렌디한 감성으로 러시아 소녀들을 폭발적 인기를 얻은 키라플래스티나의 패션 세계가 미국 틴에이저들에게 충분히 통할 수 있다고 분석하면서, 탄탄한 자본력과 뛰어난 미모까지 갖추고 있다는 점이 미국 소비자를 매혹시킬 수 있는 플러스 요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결국 러시아 디자이너들의 미국 시장 진출은 미국 시장을 사로잡는 패션 감성은 물론 튼튼한 자본력이 성공의 주요 관건인 셈. 따지고 보면 이 같은 조건은 다른 나라에 진출하는 모든 패션 디자이너들의 필요 조건이기도 하다.



예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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