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 전만 해도 디자이너들은 밀리터리 룩과 사랑에 빠져있었다. 군복, 캄플라지 프린트, 군복 모티브를 살린 수영복, 심지어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조직원들이 애용하는 두건까지 새로운 패션 아이템으로 각광을 받았다. 디자이너들의 밀리터리 룩에 열광했던 이유는 통일감 속에 내재된 활동미와 파워, 그리고 반항정신 때문.
테러 공포, 중동지역에 대한 반감이 원인
그러나 지난 9월 11일 충격적인 미국 항공 테러 사건 이후, ‘테러리스트 풍’ 밀리터리 룩은 순식간에 패션계의 왕따 취급을 받고 있다. 실제로 미 테러 사건 발발 이전에 매장을 채웠던 밀리터리풍 디자인들은 테러의 공포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모두 반품 처리되었다.
밀리터리 룩, 특히 이슬람 해방 전선 군대원풍 유니폼을 선보였던 디자이너들과 밀리터리룩 패션 화보를 가득 실었던 패션 잡지사들은 몰려드는 비난의 화살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밀리터리 룩을 선보였던 디자이너들은 이번 사태에 대해 일련의 죄의식까지 느끼고 있는 분위기.
지난 시즌 하이재커풍 두건과 총탄과 금속제 해골 장식이 달린 유틸리티 벨트를 선보였던 디자이너 라프 시몬즈는 요즘 자신의 작품을 보는 것조차 역겹다고 고백할 정도. 아랍풍 모티브를 살린 컬렉션을 발표했던 미구엘 애드로버 역시 난처한 입장이다.
현재 유럽 패션가에는 테러와 관련된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다.
9월 11일 미 테러 참사가 벌어지기 전, 밀라노와 파리의 유명 디자이너들이 중동풍 테마로 패션쇼를 계획하고 있었고, 심지어 정치적 반항심까지 표출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는 것. 실제로 런던 패션 주간에 벌어졌던 페이크런던(Fake London) 쇼에 위장복 무늬가 든 의상이 등장할 때 돌진하는 제트기 소음이 담긴 배경음악이 나오기도 했었다.
이제는 평화를 테마로 한 디자인
테러 사건 이후 중동지역에 대한 반감을 고려한 유통업자들과 패션 잡지사들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없애기 위해 밀리터리풍, 심지어 아랍 민속풍 의상이나 화보를 철저히 배제하고 있다.
밀라노 패션쇼에 참여한 디자이너들도 예년과 달리 카기 색상과 밀리터리 룩을 피했고, 장프랑코 페레가 인디언 장식, 프라다가 브로케이드를 소량 선보였을 뿐 동양적인 이미지 조차 조심스럽게 활용되었다.
이같은 현상은 패션계의 큰 손인 미유통업자들이 소비자의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밀리터리 룩 사입을 극도로 꺼리기 때문. 미유통업자들은 2002년 봄 시즌에는 소비자들에게 편안함과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재질/색상/디자인을 갖춘 아이템을 집중 사입한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있다. 따라서 아무리 아름다운 패브릭이라도 아랍의 전통 문양이 들어갔다면 미국 시장에서 환영받기 힘들다.
밀리터리 룩의 선두에 섰던 디자이너 라프 시몬즈조차 이제 ‘평화’를 패션 테마로 잡고 있다. 지난번 쇼에서 선보였던 밀리터리룩은 평화를 반어법으로 표현한 것일 뿐 테러나 혁명에 대한 동조는 아니었으며, 또한 중동풍 모티브를 사용한 것도 아랍 문화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서이지, 테러리즘을 미화한 것은 아니라는 설명. 즉 그 자신의 모토는 테러가 발생하기 전에도, 발생한 후에도 늘 ‘평화’였다고 주장하며 부정적인 이미지 씻기에 부산한 모습이다.
이처럼 급진적인 밀리터리 룩을 선보였던 디자이너들은 미국 유통업자들, 더 나아가 이슬람 문화에 극도의 반감을 갖고 있는 미국 고객들의 눈에 벗어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예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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