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주 주변에는 귀한 유적들이 많다. 지난 봄 동덕여대 박물관 팀과 함께 여주 유적을 답사 한 적이 있다.
고달사(764년 창건)지에는 석불좌, 원종대사혜진탑비, 원종대사혜진탑 등 귀중한 문화유산들이 잡초 우거진 들판에 덩그러니 방치되어 있음에도 찬란한 자태를 간직하고 있었다. 잡초 우거진 들판을 지나 세종대왕 능에 도착하였다. 조금 전 잡초 속 유물의 아픔을 순간 잊고 우리나라도 많이 달라지고 있다는 자부심에 잠시 기뻤다. 전시관 안으로 들어가니 쾌적한 실내에 여러 전시품들이 이해를 돕는 그림들과 함께 진열되어 있었다. 그 그림들을 보는 순간 아뿔싸! 지금까지 자랑스런 마음으로 이런 저런 유물과 고증품들을 보던 나는 실망하고 말았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림의 주인공들이 입은 관복의 흉배였다. 세종대왕은 홍포에 보(補)를 가식한 상복을 입혔고, 관리들도 직급에 따라 상복을 그린 것 같았다. 상복의 색은 직급에 따라 다르게 그려져 있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상복의 색이 정삼품 이상 홍포, 종삼품 4,5,6품 청포, 7,8,9품 녹포였으므로 경국대전이 세조 때 시작하여 성종에서 완성되었다는 점을 감안 할 때 세종대왕 대에도 같은 색의 포를 입었으리라 생각 할 수는 있다.
그러나 흉배는 잘못되었다. 조선왕조에서 처음 흉배의 제정이 논의된 것은 세종 때로 하연, 정인지 등이 건의는 하였으나, 영의정 황희가 검소한 기풍에 위배된다 하여 반대하였고, 그 후 단종 때 검토관 양성지가 제의하여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흉배제도는 시대에 따라 변하였다. 연산군 11년(1505년)에 다시 흉배에 대한 논의가 있어 당하 9품까지 흉배를 붙이도록 하였고, 사슴, 멧돼지, 아(鵝: 거위), 기러기 등의 문양을 추가하여 품계를 구별토록 하였다. 영조 때에는 이를 간략화 하여 문신 당상관은 운학 흉배, 당하관은 백한 흉배로 통일, 고종 때까지 시행하였다. 이것을 고종 8년(1871년)에 문신은 학으로 하되 당상관은 쌍학, 당하관은 단학, 무신은 호랑이로하고 당상관은 쌍호, 당하는 단호로 정하여 조선조 말까지 사용하였다. 따라서 흉배 제도가 시작 된 것이 단종 때였으므로 세종때의 관리들이 흉배를 하고 있는 것은 잘못이다. 또한 그림의 관리들이 쌍학, 또는 단학을 하고 있어 당상, 당하의 문관을 그린 것 같은데 그것도 물론 잘못이다.
남대문의 아픈 기억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경제 선진국의 대열에 다가가고 있는 우리나라가 귀중한 문화 유산을 잡초 속에 방치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선인들의 발명품들을 원형에 가깝게 만들어 전시하는 노력에 발맞추어 작은 것 하나라도, 그림도 바르게 그려져 역사가 바로 알려졌으면 하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