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위스’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이미지는 무엇일까.
만년설로 뒤덮인 세계적인 명산들, 산과 호수가 어우러진 평화롭고 목가적인 빼어난 자연 경관, 스스로 지킬 줄 아는 세계 최강의 군대를 가진 중립국과 세계의 금고 역할을 하는 스위스 은행, 무려 4개 국어가 공용어인 나라, 세계 최고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정교한 시계와 보석 세공 등이다.
하지만 이제 스위스하면 떠올릴 것이 늘었다. 바로 예술과 디자인이다.
프랑스, 이탈리아에 가려 있지만, 스위스도 예술의 강국이다.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과거의 유물에서 압도적이라면, 스위스는 특히 현대 예술 시장의 성지이다. 스위스에는 1000개가 넘는 박물관과 미술관이 있다.
개수로 따지자면 우리나라도 그에 육박하지만 스위스의 면적이 남한의 반도 안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수이다.
그 많은 미술관이 현대 예술 작품들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현대 조각가 자코메티, 조각가이자 키네틱 아트, 신사실주의 조각가인 장 팅겔리와 그의 아내이자 색채조각가인 니키 드 생팔, 다재다능 했던 디자이너 막스 빌, 너무도 유명한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부터 헤르조그 드 뫼롱까지 20세기 미술, 건축, 디자인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이들이 스위스가 배출한 인물들이다.
이런 스위스에서 ‘예술 올림픽’이라고 일컬어지는 아트 페어가 열리는 것도 그리 이상한 것만은 아니다.
1970년 스위스의 화상 에른스트 바이엘러에 의해 바젤에서 첫 개최된 ‘아트 바젤’은 첫 회에는 10개국, 90개의 화랑의 참가로 시작되었지만, 현재는 29개국 300개의 화랑들이 참여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예술 시장을 형성하게 됐으며, 프랑스의 피악 아트 페어(FIAC Art Fair), 미국의 시카고 아트 페어(Art Chicago)와 더불어 세계 3대 아트 페어의 하나로 꼽히게 되었다.
아트 바젤이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라는 유럽의 중심지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 덕분에 스위스는 20세기 초 현대 예술의 중심에 서게 되기도 한다. 1차 세계대전 중 진보적인 성향의 예술가, 정치가들이 중립국이었던 스위스로 많이 들어오면서 현대미술에 있어 유럽 전역에 혁신을 불러일으킨 아방가르드 운동 ‘다다이즘’이 취리히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나치의 박해를 피해 독일의 내로라 하는 유명 디자이너들이 중립국가인 스위스, 그 중에서도 독일과 바로 맞닿은 바젤로 망명 했다.
20세기 건축 디자인사의 한 획을 긋는 독일 바우하우스 운동의 주축을 이룬 인물로 스위스 출신 작가 파울 클레와 한스 마이어를 꼽을 수 있으며, 이렇게 바우하우스는 독일과 스위스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바젤은 독일의 디자인을 기본 골격 삼아 자연스럽게 20세기 디자인의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된다.
따라서 스위스 디자인의 뿌리를 알기 위해선 스위스의 역사나 사회를 단독으로 보기 보다는 20세기 이후 유럽 디자인의 흐름과 유럽 전체의 사회상, 그리고 특히 독일 디자인의 역사를 함께 살펴야 한다.
그런데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까지 접해 있는 스위스가 유독 독일에 영향을 많이 받게 된 것은 자연 환경 탓이 크다.
스위스와 서쪽의 프랑스 사이에는 쥐라 산맥이, 스위스와 남쪽의 이탈리아 사이에는 알프스가 가로 막혀 있어 왕래가 쉽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스위스는 독일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스위스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사용하는 언어가 독일어인 점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흐름은 건축뿐 아니라 그래픽 디자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헬베티카 폰트는 1957년 막스 미딩거와 에두아르드 호프만에 의해 개발된 이후 스위스 디자인뿐 아니라 Jeep, Microsoft, Nestle, Scotch, Panasonic, Post-it, MOTOROLA, THE NORTH FACE, evian, Oral-B 등의 국적을 초월해 세계적인 기업들의 CI에 사용되고 있다. 헬베티카는 스위스의 공식 명칭인 헬베티카 연방(Confoederatio Helvetica)에서 왔으며, 결국 스위스 그 자체를 의미한다.
헬베티카 폰트는 기하학적 도형과 직선적인 산세리프체로 멀리서 봐도 쉽게 눈에 띄며 기업의 신뢰도를 높여준다. 이렇게 깔끔하고 간결한 디자인은 스위스의 전매특허로 자리 잡았으며 국제적으로도 ‘스위스 스타일’이라고 불린다.
스위스 스타일은 폰트뿐 아니라 그래픽 디자인적으로도 기하학적 도형과 깔끔한 서체로 면을 정확히 구분하여 명료하고 깔끔한 인상을 준다. 이러한 점은 독일과 유사하다.
하지만 독일의 디자인이 장식 없이 최소한의 요소로만 디자인 되어 융통성이 없게 느껴지는데 비해, 스위스 디자인은 비록 직선과 기하학 도형을 사용하지만 대각선과 장식적인 요소를 좀 더 활용하여 아름다움을 더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스위스가 독일처럼 전쟁과 가난에 허덕이지도 않았고, 중립국이라는 특혜 덕에 두 번의 세계대전 때도 비교적 안정된 재정적 여유를 누릴 수 있었으며, 오랜 기간 자연 재해로부터도 안전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안정적인 기반 위에서 스위스는 일찌감치 군사적 목적에 의한 디자인보다는 광고나 카탈로그에 쓸 상업 디자인이 발달했고, 경제적인 디자인보다는 소비자의 눈길을 끌 아름다운 디자인을 선호하게 되었다. 같은 기하학적 도형을 사용하더라도 무조건적인 실용주의에서 벗어나 역동적이고 아름다운 형태를 만드는데 이용된 것이다.
패션에 있어서도 그렇다. 말하자면 ‘아크리스’는 ‘질 샌더’ 보다는 좀 더 장식적인 요소가 강하다. ‘질 샌더’가 한 컬렉션 안에서 소박하고 단조로운 디자인 변형을 보여주는 반면 ‘아크리스’는 색이나 소재, 장식에 있어 좀 더 다양한 변주를 이루어 낸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구교 국가인 프랑스의 ‘발렌티노’나 이탈리아의 ‘돌체앤가바나’ 디자인만큼은 화려하지 않다.
카타르에 이어 1인당 GDP 4위를 기록할 만큼 부국인 스위스. 그들은 그러한 부를 이루기 위해 오랜 세월 큰 국가들 사이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았으며, 스위스의 디자인에는 그러한 역사가 녹아 프랑스적인 화려함과 독일적인 소박함이 절충된 실용적인 디자인으로 사랑 받고 있다.


고학수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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