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유산 Great Heritage 43

자신의 정체성이 아직 확고히 정립되지 못한 젊은 층에서 간혹 자신의 뿌리를 부정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자신이 태어난 나라나 민족보다 대중 매체를 통해 지속적으로 주입된 외부의 다른 집단의 가공된 이미지를 동경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알게 모르게 자신에게 체득된 뿌리를 바꿀 수는 없다.
특히 요즘처럼 여러 민족이 섞여 살아가는 사회에서 개개인의 고유한 정체성을 부정 당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오히려 세계화되고 국제적인 교류가 활발해지는 시대에는 내가 태어난 나라의 전통 문화를 잘 알고 그 개성을 드러내는 것이 더 강점이 된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된다.
WASP를 대표 이미지로 내세운 랄프 로렌의 고민도 이 점이었다. 브랜드 ‘랄프 로렌’은 대표적인 멜팅 팟 사회인 미국에서 동경의 대상이 되는 동시에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처음에는 그들의 전략이 잘 받아들여졌다.
잡지와 TV 광고를 통해 지속적으로 대중들에게 각인된 금발머리 백인의 상류층 이미지는 매출과 직결되어 엄청난 판매로 이어졌다. 덕분에 ‘랄프 로렌’은 대제국을 이룰 수 있었다. 브랜드를 세분화하고 다양한 가격대의 상품을 선보여 더 많은 계층의 사람들이 ‘랄프 로렌’의 이미지를 살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점차 깨달았다. 이미지를 산다는 것이 얼마나 허무하고 진짜의 삶을 공허하게 만드는 것인지, 또한 근본적인 뿌리는 결코 변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랄프 로렌’의 광고에 흑인이나 아시아계의 모델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사람들의 비판의 목소리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랄프 로렌 회사 내부에서 백인과 다른 인종의 차별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며, 그로 인해 소송을 하는 직원들에 대한 이야기도 광고를 넘어 현실적으로 부딪히는 문제였다.
그러나 WASP가 아닌 다른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은 ‘랄프 로렌’ 브랜드의 뿌리를 흔들 수 있는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브랜드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시대에 맞게 변화해야 한다는 것은 숙명이다. 랄프 로렌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였을까?

랄프 로렌이 그 동안 대중들에게 각인시키려 한 것은 미국 백인 상류층의 고급문화였다. 여기에서 백인이라는 한 인종만의 배타적인 이미지를 빼고, ‘미국’과 ‘상류층의 고급문화’로 양분한 것이다. 이것은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다양한 이미지를 끌어들일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이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랄프 로렌’의 컬렉션에서는 분명 현대적인 백인 상류층의 이미지를 만들고자 했다.
따라서 S/S 시즌에는 요트를 타거나 고급 휴양지에서 볼 법한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이면서도 패션을, F/W 시즌에는 저채도의 코듀로이 재킷과 영국 귀족들의 승마 룩을 변형한 패션, 또는 폴로의 대표 아이템인 피켓셔츠나 프레피 룩을 변형하는 자기 복제의 주제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2010년 즈음을 기점으로 확실히 ‘랄프 로렌’ 컬렉션에서는 이전까지 보기 힘들었던 다양한 민족의 전통 문화를 반영한 컬렉션들을 선보이고 있다. 2009년 S/S 시즌에는 아프리카의 사파리와 중동 지역을 연상케 하는 하렘팬츠, 터번, 중동 여인의 화려한 보석 장식 등이 주를 이루었다.
패션을 좀 아는 사람들은 이것이 ‘입생 로랑’의 사파리 룩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지만, 좀 더 넓게는 북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백인들의 낭만성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북아프리카의 알제리 출신이었던 입생 로랑이나, 그 옆 나라인 모로코는 아프리카와 중동지역, 유럽의 특징이 섞인 문화를 갖고 있는 곳이다.
2011년 F/W 시즌에는 1920년대의 상하이와 아르데코가 주제였다.
검정을 주색으로 중국을 상징하는 빨강색과 초록색의 옥 액세서리로 시선을 강렬하게 사로잡는 방식을 택했다.
중국의 전통 복식인 치파오를 직접적으로 변형하지는 않았지만, 장신구의 문양이나 때때로 등장한 중국적인 자수 패턴만으로도 충분히 시대와 지역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이 두 컬렉션의 주제들은 분명 사업적으로 당시 랄프 로렌의 방향과 맞아떨어지기도 한다. 2009년에 랄프 로렌의 주얼리 라인을 론칭했고, 2011년에 중국으로 사업을 확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13 S/S 시즌에 선보인 스페인 문화나, 같은 해 F/W 시즌에 선보인 러시아에서 영감을 받은 컬렉션은 랄프 로렌이 그 동안 한정되어 있던 주제에서 벗어나 다양한 문화를 영감의 원천으로 활용하려 한다는 점에 힘을 실어줄 수 있었다.
이는 2000년대 초 다양한 문화권에서 영감을 받아 전설적인 패션쇼를 쏟아냈던 존 갈리아노의 방식과도 같다.

다만 디자인적으로 존 갈리아노가 다양한 지역의 문화에서 영감을 받되 옷의 구조를 아예 새롭게 변형시키고, 헤어와 메이크업를 초현실적으로 활용해 현존하는 전통 복식이 아닌 다른 차원의 세계를 만들어냈다면, 랄프 로렌은 현대 복식 구조에 전통 복식의 문양이나 액세서리, 작은 소품을 표면적으로만 사용하는 소극적인 변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또한 비판적으로 보자면 이러한 주제의 컬렉션은 백인들의 제국주의적인 시각을 벗어나지 못한다. 타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없이 백인의 입장에서 제3자의 문화를 단편적으로 바라 보는 것이다. 그런 면은 할리우드 영화가 비판 받는 이유와 비슷하다.
일부의 민족에게만 의미가 있는 개성적인 전통 복식을 현대화하고 전세계인이 즐길 수 있도록 보편적인 패션으로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남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듯 최근 ‘랄프 로렌’의 컬렉션에는 주제의 세분화를 통해 미국의 다양한 전통과 역사를 반영한 컬렉션과 함께 다른 문화에도 개방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랄프 로렌의 이러한 변화는 ‘랄프 로렌’ 제국이 지속될 수 있는 새로운 힘이 될 것이다.
고학수 객원기자
marchberr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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