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유산 Great Heritage 42

때때로 우리는 미국의 역사가 짧으며 전통이 없다고 비웃고는 한다. 5000년 한반도의 역사 vs 미국 독립 200년 역사라는 단순한 수치로 비교하기도 한다. 대개 미국의 역사는 영국의 식민지시절 영국으로부터 13개 지역 독립을 선언한 1776년을 그 역사의 기원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전, 유라시아 동쪽 끝에서 베링 해협을 건너 미대륙으로 건너가 그곳에 2만여년의 역사를 일군 미국 대륙의 원주민(native American)의 역사에 대해서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그에 대한 역사는 미국인들도 낯설다.
게다가 콜럼버스가 미대륙을 발견한 1492년부터 1776년 독립까지, 200여 년간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펼쳐진 유럽 식민지인과 아메리카 원주민, 그리고 아프리카 흑인 간의 혼합된 삶의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1607년에 영국 식민지인이 버지니아에 제임스타운(Jamestown)을 건립하며 시작된 미국 식민지 시대의 역사 그리고 그 시기 인종간의 만남과 교류의 역사는 미국인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낯선 역사’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 시기가 바로 현대 미국의 전통이 만들어지던 시기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랄프 로렌은 이 안개 속에 가려진 듯 뿌옇게 정의되지 않은 역사를 그들의 전통과 문화 유산이라는 이미지로 시각화 해냈으며, 전세계인에게 미국의 전통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교육시키고 있다.
세계에서 4번째로 넓은 국토 면적을 자랑하는 미국은 형성된 지역의 역사에 따라 크게 몇 개의 구역으로 구분된다. 우선 북동부 지역은 대서양을 건너온 유럽인들에 의해 가장 먼저 개발이 이루어진 지역이다. 지금의 북아메리카에 영국인들을 중심으로 한 유럽인들이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초반이었다.
1620년 11월에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9주간 고난의 항해를 한 끝에 지금 미국 동해안의 케이프 코드에 도착한 이 필그림(신교도 농부)들은 미국을 지배할 와스프(WASP)의 선조가 된다. 1630년 3월에는 청교도 1000 여명이 북아메리카로 이주했고, 그 이후 10년 동안 1만8000 여명이 그 뒤를 따랐다.
다양한 유럽인들이 특히 경제적 이유로 이주하기도 했지만, 영국의 청교도들은 종교적 목적으로 이주했다. 그들은 매사추세츠 지역을 개발하면서 장차 미국을 지배할 종교적, 사상적 토대를 쌓아갔다. 결국 필그림과 청교도, 두 문화가 이 북동부 지역을 형성하는 토대가 된다.

따라서 이 지역은 신앙심이 깊고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적 기질을 엿볼 수 있는 지역이다. 현대 미국의 역사는 대서양 연안의 도시들에서 시작되었으므로 아무래도 유럽으로부터 온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미국인들 중에서도 가장 전통적인 갑부들이 많다.
이에 따라 고급 문화도 상당히 발달되어 있다. 특히 뉴잉글랜드 지역 사람들은 자신들이 유럽인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랄프 로렌이 선보이는 패션 중 특히 근대 영국 귀족들의 의상에서 영감을 받은 것은 이러한 동부 지역 조상들의 먼 전통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영화 ‘고스포드 파크’에서 체크 무늬의 모직 코트와 모자를 쓰고 여우 사냥을 떠나는 남성 귀족들, 저녁에는 실크 드레스를 입고 사교 파티에 참석하는 여성들을 연상시킨다.
현재는 마천루로 뒤덮이고 빠르게 흘러가는 동부 도시들과는 반대의 성향을 지닌 곳이 미국 남부 지역이다. 보통 남부는 미국의 남동부를 가리킨다.
이 지역의 독특한 지역색과 역사는 다양한 민족 구성에서 시작된다. 이 지역은 초기 스페인, 프랑스, 영국의 식민지였으며, 진보된 문명을 가진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터전이자 노예로써 유입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농장지대였다. 남부 연합의 전통과 남북 전쟁에서의 패배, 노예 인구, 플랜테이션 등으로 이곳의 역사와 관습은 타지역과 구분된다.

이 지역의 백인들은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남부 귀족들의 후예들로, 현재까지 일부 백인들은 과거 상류 사회를 이루었던 영국계 미국인과 은퇴 후 남부에 주거 중인 노인 등으로 생활 수준이 매우 높다. 넓은 평원에서 사냥이나 승마 같은 야외 활동을 즐기는 카우보이와 생활력 강한 여성의 이미지다.
최근 이 지역 출신으로 21세기의 워너비로 등극한 디자이너가 바로 ‘토리 버치’이다. 남부 사교계에서 유명 인사였다는 그녀야말로 현대화 된 미국의 남부 지역 상류 사회의 표본이다.
그렇다고 남부 지역을 떠올리게 하는 컬렉션의 의상들이 꼭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낭만주의식 의상 같지는 않다. 대신 그러한 분위기가 연상되도록 현대화된 낭만주의 의상으로 긴 A라인 스커트와 넓은 벨트로 강조한 가는 허리, 때로는 퍼프 슬리브의 프릴 블라우스와 레이스 장식 등으로 여성성을 강조하도록 변화되었다.

그렇다면 인디언을 연상시키는 은과 터키석의 장신구, 투박한 듯 화려한 무늬의 직물은 어느 지역에서 유래했다고 볼 수 있을까?
동부에 밀집해 있던 인구는 골드 러쉬와 자신의 땅을 가질 수 있다는 정책과 희망으로 서부로 이동하게 된다. 이렇게 서부로 이동하는 중에 중부 대평원이 대규모 목축에 적합한 곳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곳에 살던 원주민을 쫓아내고 이 지역을 차지했다. 이 과정에서 인디언들의 복식 문화도 미국의 전통으로 녹아 들게 된다.
또한 척박한 환경을 개척해 나갔던 지역에서의 작업복이었던 데님 또한 미국의 문화를 대변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영화 ‘가을의 전설’의 의상과 자연 환경,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의 모습에서 보여지는 이미지들이다.
이렇듯 미국은 짧다면 짧은 역사를 가졌음에도 현대 사회에 대한 그 영향력 때문에 지역과 시간에 따른 다양한 전통 복식 이미지를 세계인과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아마도 이 과정에서 랄프 로렌은 할리우드 영화의 덕을 많이 봤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영화들을 통해 대중들도 랄프 로렌의 컬렉션을 보면서 익숙하고 보편적인 미국의 이미지들을 연상하는데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고학수 객원기자
marchberr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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