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유산 Great Heritage 38

샹젤리제 거리. 저 멀리 개선문(Arc de Triomphe de l etoile)이 보이고 조명 장식으로 꾸며진 양 옆의 가로수가 있는 대로는 파리를 대표하는 풍경이다.
1806년 나폴레옹 1세가 휘하 군대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계획하였으나 나폴레옹의 실각으로 공사는 중단되었다가 1836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완성되었다. 높이 49 m, 너비 45 m로 대체로 고대 로마의 개선문의 양식을 따랐으나 프랑스 근세 고전주의의 걸작으로 꼽힌다.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된 개선문 너머 저 멀리 거대한 사각형의 현대식 건물이 있다. 파리에서 8km정도 떨어진 라 데팡스(La Defence)라는 현대식 상업지구에 1989년 프랑스혁명 200주년을 기념하여 지은 신(新) 개선문인 ‘라 그랑드 아르슈(La Grande Arche)'이다. 가운데가 기둥 없이 뻥 뚫려 있어 멀리서 보면 말 그대로 사각형의 프레임의 모양을 하고 있다.
최첨단 고층 빌딩이 늘어서 있는 라 데팡스 구역에는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전시를 했던 칼더나 미로, 세자르, 타키스 같은 현대 미술가들의 야외조각들이 있다. 차들은 라 데팡스 광장 지하로 다니게 설계 되어 보행자들은 그 앞을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다.
루브르 박물관, 콩코르드 광장을 거쳐 샹젤리제 거리와 에투왈 개선문, 라 데팡스의 신 개선문까지 직선 도로로 연결된 파리시의 도시 계획을 보고 있으면 파리가 왜 그렇게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적인 도시인지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되는 가치인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그들은 도시에서부터 이루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인들의 과거의 전통과 문화를 현대에 거쳐 미래까지 연결시키려는 철학을 건축물을 통해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파리를 대표하는 또 다른 건물인 오르세 미술관도 프랑스인들의 이러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의 현대 미술을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오르세는 파리 교외와 파리를 연결하는 역이었다.
1937년 파리 시 외곽에 다른 기차 역들과 지하철이 들어서면서 오르세 역은 50여 년간 폐쇄되었다가 1986년 미술관으로 재탄생 되었다. 역사적 건물을 현재로 되살린 모범적인 사례이다.
특히 미술관은 역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표를 끊고 들어가야 하는 점도 그렇지만, 많은 사람과 물자가 모이는 만남의 장소이다.
역이 먼 거리를 이동한 동시대 인들의 교류라면, 미술관은 시대를 넘어서 대중이 클래식과 고전을 만나 잊고 있던 가치를 다시 짚어보고, 미래에 대한 영감을 받을 수 있는 곳이다.

‘문화는 상류사회에서 만들어 하류사회로 하달되거나 배급되는 것은 아니다’ 라고 린 헌트가 말했다. 프랑스 예술의 장점은 고급 예술은 끊임없이 대중화에 힘쓰고, 대중예술은 고급화에 힘쓴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 있어 대중가요와 클래식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음악이다. 발전되어온 역사적 맥락부터 향유하던 계급, 장르적 특징이 모두 다른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의 샹송은 오페라의 가사나 20세기 유명한 작가들의 시를 가사로 차용한다.
고급 예술이 일방적으로 대중 예술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대중 예술도 고급 예술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을 통해 견고했던 사회의 계층이, 개념이, 문화가 완전히 전복된 경험이 있기 때문일까? 이러한 생각의 차이는 현대 철학에서 독일이 프랑스에 주도권을 뺏기게 된 이유가 되기도 한다.
전통과 권위를 중시하는 아카데미즘이 강한 독일은 특히 철학으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었다. 그러다 1950년 이후 사르트르, 푸코, 데리다 등 프랑스 철학자들이 우위를 점유하게 된 것은 대중화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헤겔 사전이 따로 있을 만큼 독일 철학은 관념적이며 이해하기 어려워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한 데 비해, 프랑스 철학은 대중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쓰여졌다.
프랑스에서는 택시 기사도 철학자를 논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특히 고급 문화와 대중 문화의 가장 먼저 만난 지점이 바로 미술이었다. 르네상스 이후 서양 미술이 추구한 것은 외부 세계를 똑같이 그리는 것이었다.
3차원의 세계를 2차원의 평면으로 옮기기 위해 기술적으로는 원근법과 명암법, 해부학을 발전시켰고, 주제는 종교, 신화, 또는 권력자의 초상화에 머물렀다. 아카데미즘은 미술계에도 만연해 있었다.
사람들은 화가들이 그린 고고한 주제의 그림만 볼 수 있었다. 물론 아무나 볼 수도 없었다. 그것이 깨지게 되는 지점이 바로 1900년대 초, 파리의 몽 마르트르 언덕, 인상주의 미술에서였다.

하필이면 그 시기, 그 지역에 그렇게 천재적인 화가들이 많이 모이고 등장하게 된 이유는 물론 복합적이지만, 파리 시의 발전과도 관련이 있다.
파리에서 가장 높은 언덕 몽 마르트르와 사크레쾨르 성당, 그 주변에 위치한 떼아트르 광장까지 이 지역은 그 전까지는 지반이 약해 4층 높이의 건물밖에는 짓지 못하던 촌 동네였다. 농사를 짓고 풍차를 돌려 동력을 얻던 이 지역이 파리 시에 편입된 것은 1859년이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시 외곽은 집세가 싸서 가난한 예술가들이 몰려들기 좋다. 새로운 도시가 세워지면서 그 많던 풍차들이 모두 철거되었지만, 그 중 하나의 풍차는 캬바레로 용도변경을 하며 당시의 신지식인들은 모두 들러봐야 할 아방가르드한 장소로 거듭난다. 그곳이 바로 빨간 풍차, ‘물랭 루즈’다.
뚤루즈 로트렉은 이 물랭 루즈의 아찔한 풍경과 광고 포스터를 제작해주며 생계를 꾸려갔던 화가였다. 그가 제작했던 상업적인 포스터에서 자유분방한 손 글씨를 엿볼 수 있다. 그것은 화가가 제작한 포스터였기에 가능한 디자인이었다.
만약 독일의 기능주의에서 시작된 포스터였다면 줄과 각을 딱 맞춘 타이포그래피가 들어가 있었을 것이다. 프랑스의 예술과 상업성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은 카스텔바작에 의해 프랑스 패션에서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고학수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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