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4대 컬렉션을 통틀어 기묘한 이미지로 관객들에게 충격과 혼란을 주는 것은 레이 가와쿠보의 컬렉션이 단연 독보적이다. 처음에는 말문이 막힐 정도로 독특한 형태와 색으로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진다.
어쨌든 모델이 입고 있으니 옷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일상복처럼 입고 편히 움직일 수는 없을 것 같아 보이는 것이 태반이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팔리는 옷’과도 물론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녀의 컬렉션을 보고 머리가 복잡해 지는 것은 너무나도 독특한 디자인 때문만이 아니다. 내가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옷에 대한 개념이 깨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저런 옷을 누가 입어?’ 라는 단순한 질문부터 ‘도대체 왜 저런 디자인을 한 것일까, 저렇게 해괴망측한 디자인을 한 디자이너의 숨겨진 의도와 개념은 무엇일까?’까지 질문의 범위는 점진적으로 확장된다.
이러한 질문의 답을 알아가기 위해 우선 디자이너 ‘레이 가와쿠보’에 대해 살펴보자. 그녀가 자라온 환경을 알게 되면 그녀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작은 실마리라도 잡히지 않을까?
레이 가와쿠보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새로운 시각으로 보면 그녀또한 전쟁시기를 겪은 70대 할머니 중 한 명인 것이다.
그녀가 태어난 1942년에는 둘리틀 공습, 1945년에는 도쿄 대공습으로 이어졌다.
아주 어린 나이였지만 전쟁의 힘든 시절을 겪었다. 우리나라는 일제에 의해 강제 점령 당한 시기였고, 일본 본토는 미국의 공격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었다. 그래서 일까? 레이 가와쿠보가 파리 컬렉션에 진출했던 1980년대, 프랑스 언론들은 그녀의 패션을 ‘가난의 미학이 낳은 포스트모던 패션’, 또는 ‘추의 미학’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그녀가 누더기처럼 너덜너덜하게 해진 옷들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1960년대 일본은 고도의 산업 성장을 이루던 시기였다. 2차 세계대전의 패망으로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던 일본은 한국의 6.25전쟁으로 인한 전쟁 특수로 빠른 시간 미국에 버금가는 경제 성장을 이뤄냈으며, 64년에는 도쿄 올림픽까지 치르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이후 미군의 주둔기간 동안 미국의 소비문화가 일반 대중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이 시기는 국가의 경제적인 재건이 급선무였다. 전쟁 후 고도 경제 성장기의 일본에는 산업의 조직화, 교육 엘리트의 양성, 고용 및 해고의 결정 또는 생산라인의 품질관리 등이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1950~1953년의 한국의 6.25전쟁은 일본의 경제적, 산업적 회생에 박차를 가하는 중요한 시기로, 일본의 많은 거물급 경영인들이 경영학을 연구하기 위하여 해외에 단체 여행을 떠났으며, 제품의 발전에 디자인의 중요한 역할을 인지하고 외국의 저명한 디자이너들을 초빙하여 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전쟁과 고도 성장기를 한꺼번에 경험한 레이 가와쿠보는 게이오 대학에 진학하여 미술과 문학을 전공하였다. 그녀가 패션을 정식으로 공부한 것이 아니고, 따라서 패션에 있어 다른 디자이너들과는 다른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후 그녀는 일을 통해 패션 사업에 필요한 다양한 경험을 쌓기 시작한다.
1964년 대학 졸업 후 일본에서 가장 큰 섬유화학 기업인 아사히 카세이(Ashahi Kasei)의 마케팅 부서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녀의 주 업무는 텔레비전과 지면 광고물을 제작하는 일로, 섬유소재에 패셔너블한 이미지를 부여하여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이었다.
1967년에는 일본 최초로 스타일리스트로 활동하게 되었는데, 두 작업 모두 사람들에게 패션을 더 패셔너블하게 보여주기 위해 설득해야 하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스타일링 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그녀는 1969년 자신만의 옷을 만들기로 하고, 제작과 판매를 통해 디자이너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브랜드명 없이 작업을 시작하였으나, 1973년 마침내 그녀의 회사를 설립하게 되었고, ‘꼼 데 가르송(Comme Des Garcons)’이라는 브랜드가 탄생하였다. ‘꼼 데 가르송’은 프랑스어로 ‘소년들 같은(like boys)’이라는 뜻으로, 뭔가 특별한 의미가 담긴 듯한 명칭이었으나, 단지 프랑스어의 어감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채택된 이름이었다.
대학 졸업 후 10여년에 걸쳐 다양한 패션 분야를 경험한 레이 가와쿠보는 획일적인 의상 제작과 기성복의 시스템을 싫어했다. 1975년, 가와쿠보는 도쿄에서 첫 번째 여성복 컬렉션을 개최하고 플래그십 스토어를 오픈하였다. 그녀의 갤러리같은 플래그십 스토어 콘셉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녀는 ‘꼼 데 가르송’ 매장을 단지 옷을 사고 파는 장소만이 아닌 그 이상으로 만들고자 의도하였고, 그녀의 옷은 상품으로서의 성격을 극도로 배제한 채 마치 갤러리의 미술작품이나 인테리어 장식의 일부처럼 디스플레이 되었다. 그녀의 옷이 현대 예술작품처럼 보이는 것은 그것이 놓여진 배경이 되는 매장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브랜드 초기부터 예술품처럼 보여지는 것에 집중했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녀의 독특한 실험이 단순히 실험으로 끝나고, 사람들의 반응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면, ‘꼼 데 가르송’은 그냥 그렇게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꼼 데 가르송’은 이내 매니아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로써 도쿄에서 자신의 입지를 단단히 다진 가와쿠보는 1980년대 파리 컬렉션에 진출하면서 서구 패션계에 핵폭탄급 충격을 가하기 시작한다.
모든 디자이너들이 ‘새로움’을 주장하지만, 사실은 트렌드나 ‘웨어러블한 옷’이라는 스스로의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범위에서 디자인을 변형할 뿐이다. 레이 가와쿠보는 초기부터 이러한 노선과 결별했다. 그 결과 예술에 가까운 패션으로 독보적인 세계관을 가진 디자이너가 탄생했다.



고학수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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