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변방국에 머물렀던 이탈리아는 1980년대 들어 디자인의 중심 국가로 떠올랐다. 조르지오 아르마니, 지아니 베르사체, 돌체 앤 가바나, 모스키노, 지안 프랑코 페레 등의 패션 디자이너뿐 아니라, 산업 디자인계의 알레산드로 멘디니, 에토레 소트사스, 안드레아 브란치 등 세계적인 이탈리아 디자이너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마치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등 르네상스 시대의 도시 피렌체가 그랬던 것처럼, 밀라노를 중심으로 새로운 디자인 문화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분명 이전의 디자인 도시라 여겨졌던 파리나 런던과는 차별화된 이탈리아만의 향기를 고스란히 뿜어냈다.
하지만 그렇다고 화려한 색과 형태로 사람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 산업 디자이너 알레산드로 멘디니와 저채도 회색빛의 은근하고 우아한 매력으로 높은 안목의 사람들을 더욱 열광시키는 패션 디자이너 아르마니가 과연 어떤 점에서 이탈리아의 문화 유산을 물려 받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표면적으로는 너무도 다른 개성을 뽐내는 디자이너들인데 말이다.

우선 화려한 색으로 먼저 시선을 사로 잡는 멘디니의 작품을 살펴보자. 원색의 강렬함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는 멘디니의 색은 사실 자세히 뜯어보면 원색과 함께 파스텔 계열의 색을 같이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원색만 사용할 때보다 좀 더 따듯하고 풍부한 색감을 드러내며, 시간을 오래 머금어 빛이 바랜 듯한 이미지를 풍긴다. (사진 1)
이러한 색 사용법은 멘디니만의 특징이라기 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르네상스 이전 시대, 종교의 힘이 막강했던 이탈리아에서 교황이나 사제, 성모 마리아는 강렬한 빨강이나 보라, 짙은 파랑 등의 원색 의상을 입고 있었다.
이는 종교화에서 성서의 대표적인 인물들을 상징하는 표현이었다. 합성 염료가 나오기 전에는 선명한 색의 원단은 최고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만이 입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요하지 않은 주변 인물들은 비교적 어둡게 표현되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하고 천재 화가들의 등장으로 좀 더 폭넓은 주제와 구도, 빛에 대한 표현, 인물에 대한 표현 방식이 바뀌면서 색에도 변화가 생겼다. 다양한 인물을 표현하는데 있어 원색의 의상과 함께 좀 더 밝은 색의 파스텔 톤의 의상들을 입은 주변 인물들이 채워지면서 화면은 다채롭고 풍부하게 표현되었다. (사진 2)
이렇게 색의 원리를 따져 살펴보면 아르마니의 의상도 결코 회색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된다.
아르마니 컬렉션에서 간간히 보이는 눈에 띄는 색상들도 이탈리아 회화의 논리를 따라 적용 되어 있다. 색은 고유한 단독의 색으로 존재하기 보다는 주위에 배색된 색의 영향이나 빛을 받아 다양한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인식되는데, 아르마니에 표현된 색상도 르네상스 회화의 색채론을 따르고 있다.

다만 멘디니와 다른 점이라면 멘디니는 보색 대비를 사용하여 색을 화려하고 다채롭게 보이도록 한다면, 아르마니는 초록이면 같은 초록 계열, 분홍이면 분홍 계열의 톤 차이만 두어서 색이 우아하면서도 풍부해 보이도록 한다는 점이다. (사진 3)
아르마니의 디자인의 특징은 강렬한 개성이 아니라 은근한 세련미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히려 르네상스 회화보다는 건축의 영향을 더 크게 받았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본 이탈리아 건축물, 골목길 풍경, 성당 등에서 영향을 받은 다양한 저채도의 의상들은 사람들을 한눈에 사로잡기는 힘들다. 게다가 화려한 장식이나 무늬마저도 배제한 의상은 무엇으로 과연 사람들에게 매력을 어필해야 할까?
그럼에도 아르마니는 1980년대 이후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행보를 보인 디자이너였다. 그의 인기의 비결은 르네상스 건축의 비밀, 비례미였다. 비례는 디자인의 기본 중에서도 가장 기본 골격이 되는 핵심 요소이지만 웬만큼 훈련이 되고 깊은 내공을 지닌 사람이 아니면 인지하기 어렵다. 그러나 멘디니나 아르마니 모두 이탈리아의 건축물로부터 끊임없이 아름다운 비례에 대한 자극과 훈련을 받은 것 같다. (사진 4)
과거 패션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화려하고 복잡한 장식은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사라지게 된다. 그 장식이 사라진 의상의 전면부를 대신하게 된 것이 다름아닌 아름다운 ‘비례’였다.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은 이를 알고 있었다. 특히 21세기까지도 사랑 받는 브랜드 샤넬 또한 이 비례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이를 적용하여 20세기 여성복의 대표적인 스타일을 만들어 냈다.

검정색을 현대 패션에 적용한 샤넬과 달리, 아르마니는 회색을 그의 대표 색으로 끌어들였고, 비례를 통해 제한된 색으로 절제된 매력을 선보이며 이전까지 디자이너들과는 다른 세련미를 현대복식에 부여하게 된다. 이 엄격한 규칙으로 인해 아르마니는 매 시즌 변하는 패션계의 트렌드 색과 실루엣, 주제를 벗어나 디자이너들이 그토록 원하는 영원성, 클래식함을 얻게 된다. (사진 5)
재미있는 것은 패션 디자이너인 아르마니는 르네상스 회화에 나타나는 옛날 사람들의 복식 형태나 색을 따르지 않고, 산업 디자이너인 멘디니 또한 르네상스 건축의 형태나 색을 따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이탈리아 문화 유산의 속성을 가져온 것이지, 전통을 답습하거나 유지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이 점은 전통 문화를 현대화하고 세계화 하려는 디자이너로서는 꼭 곱씹어 봐야 할 중요한 문제이다. 과연 한국 문화의 속성은 무엇일까? 이제는 단순히 한복의 형태, 단청의 색, 사찰의 꽃살문, 오행색을 가져오는 데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고학수 객원기자
marchberr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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