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유산 Great Heritage 19 - 질 샌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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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패션에 주목해야 할 때

2013-11-15 오후 3:09:07




미니멀리즘의 여왕 질 샌더가 은퇴를 밝혔다. 그녀는 1943년생으로 올해 만 70세이다. 패션을 공부하고 몸 담은지 반세기가 되었으니, 그녀의 삶에는 현대 패션사가 오롯이 담겨 있다. 


독일의 이미지가 워낙 기계, 견고함, 공학, 원리원칙, 논리적, 실용과 합리주의 등으로 박혀 있어 독일에도 패션이란 게 있나 싶지만, 놀랍게도 독일의 패션 산업은 섬유류 수출 세계 3위, 직물 수출 세계 3위, 의류 수출 세계 4위이다. 의류 품목별로는 신사복이 이탈리아에 이어 세계 2위, 재킷이 한국에 이어 세계 2위이며, 드레스류는 세계 1위의 수출국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이다.
달리 말하면, 오늘날 독일의 섬유 및 의류 산업의 연간 판매량은 자국 수출의 40 %를 차지하며 약 200억 유로(한화 28조원)에 달하는 것이다.


이렇게 활발한 독일의 패션 산업과 맞물려 베를린 주정부는 2007년부터 '패션 수도 베를린'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앞서 2001년 시작된 캐주얼 패션 박람회 'BBB(브래드 & 버터 베를린)'와 '메르세데스 - 벤츠 패션 위크 베를린', 다른 유럽 국가에서는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높은 패션학교 비율, 국제적인 패션 디자인 어워드 개최 등 베를린은 파리, 밀라노, 런던, 뉴욕에 버금가는 패션 도시로 거듭나기 위해 정부, 지역사회, 학계, 국민들이 뭉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수 십 년간 샤넬의 수장으로 패션계의 제왕이라는 칭호를 놓치않는 있는 칼 라거펠트도 독일 함부르크 출신이며, 우리나라 기업이 인수한 MCM은 독일 뮌헨에서 탄생된 브랜드로, 독일 특유의 완벽한 품질과 견고함으로 빠른 시간에 인지도를 높인 브랜드다. 이외에도 휴고보스, 에스까다, 아이그너, 보그너, 버켄스탁, 아디다스, 푸마 등이 잘 알려진 독일 태생 브랜드들이다.


특히 질 샌더는 독일 디자이너이자 독일의 정체성을 패션 미학으로 표현한 디자이너로 세계적인 사랑을 받았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독일이 패션계에서 떠오르는 시기에 은퇴를 한다니 지나온 세월이 안타까울 뿐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의 패션 인생은 디자인처럼 간결하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질 샌더는 1967년 독일에서 패션사업을 시작하였으며, 파리를 거쳐 밀라노에서 질 샌더의 컬렉션을 소개하다가 결국 이탈리아의 브랜드 프라다에 인수되었다. 프라다의 CEO이자 미우치아 프라다의 남편 베르텔리와의 마찰로 라프 시몬스에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자리를 내주고는 일본 브랜드 유니클로와 협업하면서 자신의 신념을 담은 디자인을 계속 발표해왔다.
마침내 2013 S/S 시즌에 자신의 브랜드 질 샌더로 돌아왔지만, 2014 S/S 컬렉션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발표한 것이다. 


그녀의 험난했던 패션 역사는 독일의 역사와도 비슷해 보인다. 지금의 독일은 국내총생산 세계 4위, 1인당 국민소득도 4만 달러가 넘으며, 21세기 새로운 패션 강국을 넘보지만, 사실 1871년 비스마르크에 의해 통일되기 전에는 350여개의 작은 지역으로 갈라져 있던 작은 봉건국가에 불과했다.


우선 자연 환경이 척박했다. 남부 유럽처럼 날씨 좋고 따듯한 이탈리아, 스페인, 남부 프랑스에 비해, 북방 민족인 게르만족이 사는 곳은 춥고 습기 찬 중부 유럽으로 1년 내내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거나 구름 낀 음산한 날씨가 계속되었으며, 13세기 후반 국토를 개간하기 전까지는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도 없는 늪지대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초기 게르만족은 사냥과 채집, 약탈이 중심이었다.


정치적으로도 다양한 게르만 민족이 300여개의 작은 나라로 나뉘어졌으니 절대 왕정을 이루어 가던 옆 나라 프랑스나 스페인, 영국에 비해 경제적 규모가 작을 수 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17세기에 두 진영으로 나뉜 신교, 구교의 30년 전쟁의 격전지가 되어 독일 전체 인구의 3분의 1을 잃는 등 2류 국가로 떨어졌다.


마침내 1871년 강력한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도이치 제국으로 통일된 이후 독일은 유럽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했다. 바이마르 시대를 거쳐 2차 세계대전까지 패션산업은 독일의 가장 생산적이고 수익성 높은 산업이었으며, 국가 최대의 수출 항목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패션의 수도를 파리에서 베를린과 비엔나로 옮기기 위해 유서깊은 패션 하우스들을 이전시키려는 시도도 있었다. 파리에 온 나치당원들의 부인들이 오트 쿠튀르 하우스의 의상에 열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패전국이 된 독일은 어마어마한 전쟁 배상금과 살인적인 인플레이션, 심리적 절망감, 그리고 분단국으로 또 다시 고통스러운 가난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독일의 현대사 한 가운데, 심지어 제2차 대전 중간에 태어나 자란 패션 디자이너가 질 샌더이다.


그러니 질 샌더의 패션은 장식적이고 화려할 수가 없다. 우선 독일이라는 국가가 프랑스나 영국처럼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왕이 지배한 나라가 아니었으므로 왕권 강화를 위한 목적으로 화려하고 세심한 디테일이 살아있는 장식적인 문화가 발달하지 못했다.


대신 근현대를 거치며 뼛속까지 깊이 새겨진 근검절약과 실용적인 미학이 고스란히 패션으로 녹아들어 장식이 아닌 최고급 소재와 편안한 착용감으로 옷의 고급스러움을 표현하는 방식을 택했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미학을 패션계가 화려함이 정점을 찍던 70년대부터 고수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바로 그 간결함, 장식을 배제하고 구조로서 디테일을 충족시키는 미학이 일하는 현대 여성들에게는 오히려 잘 맞게 되었다. 그녀의 패션은 90년대부터 비로소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고학수 전문기자
marchberr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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