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겠지만, 패션도 기술 발전과 시대 정신이 주거니 받거니 하며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 낸다. DTP(Digital Textile Printing)라는 프린트 기술 덕분에 이제는 무한한 상상력을 옷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에는 꽃무늬, 줄무늬나 도트 무늬 같은 기하학 무늬, 역사적 맥락을 가진 체크 무늬 등이 주류였다면, 이제는 디자이너가 원하는 평면 회화는 무엇이든 표현이 가능하다.
이를 통해 옷에 프린트하는 무늬의 주제가 바뀌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시도하지 못했던 상상속의 풍경이나 보편적으로 아름답다고 여기지 않던 무늬나 주제를 옷에다 프린트 하게 된 것이다. 주제가 바뀌기 시작했다는 것은 21세기 사람들의 시각이나 정신이 변화했다는 것이다. 이를 포스트 모더니즘의 연속선상으로 볼 수도 있겠다.
서양화의 역사도 그렇다. 시대의 요구에 따라 그림의 주제가 달라진다. 중세에는 종교적 장면이 강했고, 신고전주의 시기에는 고대 신화의 장면이, 왕이나 상인 계급의 힘이 막강해질 때는 그들의 초상화를 똑같이, 그러나 약간의 왜곡(일명 뽀샵 기능)까지 제대로 하는 화가가 각광받았다.
기술의 발전으로 사진기가 등장하면서, 화가들은 돈 있는 사람들로부터 멀어졌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현대 회화다. 작가의 개성에 따라 각기 다른 주제,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아이돌만큼이나 인기있는 작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패션에서 DTP의 개발은 마리 카트란주라는 런던의 막강한 신인 디자이너를 탄생시켰다. 그녀는 누구도 옷으로 표현할 생각하지 못했던 향수병, 반복적인 연필, 타자기, 실내 인테리어 등을 옷의 구조와 연결하여 선보였다. 이후로 디자이너들은 각기 개성적인 프린트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돌체 앤 가바나」처럼 자신들의 전통 유산을 무늬로 가져오기도 하고, 해골이나 인체 해부학처럼 언뜻 징그럽거나 불쾌감을 주는 무늬를 표현하기도 한다. 제레미 스캇은 팝 컬처(Pop Culture), 즉 영화나 음악, 만화 등을 통해 전 세계에 대중화된 문화를 옷으로 표현한다.
2013 F/W 파리 컬렉션에서 눈에 띄는 패션쇼가 있었다. 일본에서 주로 생산되는 로봇 애니메이션에 등장할 법한 로봇 캐릭터가 여성의 신체에 표현된 것이다. 모델은 그 자체로 로봇이다. 「그라운드 제로(Grond Zero)」라는 생소한 브랜드였다. 몸에 밀착되는 레깅스, 부피감과 미래적인 이미지를 표현하는 네오프렌 같은 신소재가 DTP와 만나 로봇 애니메이션을 현실화했다.
프린트도 물론 놀랍지만, 머리에 쓴 액세서리나 신발까지 완벽하게 구현하여 그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세계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다. 마지막에 등장한 두 검은 머리 청년을 보고 ‘역시 일본 브랜드구나, 그들은 현대적인 문화 유산도 잘 활용하는구나’ 했는데 놀랍게도 홍콩 형제의 브랜드였다.

홍콩인인 필립과 에릭 츄 두 형제로 이루어진 브랜드로 2003년 브랜드를 시작했지만 2013 S/S 시즌에 마침내 파리 컬렉션에 입성했다. 지난 주 한 음악방송 프로그램에서 2NE1이 입고 나온 의상이 그들의 S/S 컬렉션 의상이었다. K-pop의 첨단을 달리는 가수가 선택한 브랜드라니, 뭔가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전통 문화 유산이 아닌 대중 문화를, 그것도 자국이 아닌 남의 나라에서 발생한 문화를 옷으로 표현해도 ‘위대한 유산’ 코너에 넣을 수 있을까? 필자로서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전통 문화라는 것도 사실 외국에서 유입된 문화가 들어와 기존의 것과 섞여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는 현상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한복의 당의나 족두리, 마고자도 중국의 영향이다.
번역의 문제 때문에 자국의 전통 문화는 자국민이 가장 잘 알 수 밖에 없으나, 국가의 영향력에 따라 인지도도 떨어진다. 세계인들이 「돌체 앤 가바나」의 비잔틴 모자이크화는 알아도, 고구려의 천마총은 어느 나라의 어느 시대 유물인지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현대의 팝 컬처는 전 세계적인 인지도를 가진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레이디 가가 같은 팝 가수, 일본 망가, 우리나라의 뽀로로까지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이미지이다. 이것을 누가 먼저 얼마나 멋있게 활용하는가가 현대 패션계의 전쟁인지도 모른다. 「그라운드 제로」의 컬렉션 덕분에 위대한 유산의 의미를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라운드 제로의 사전적 의미는 폭탄의 낙하점, 핵폭발 바로 아래 혹은 위의 지점을 뜻하는 군사 용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 ‘리틀보이’의 피폭지점을 일컫는 말이었다고 한다. 이후 핵폭탄이나 지진과 같은 ‘대재앙의 현장’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는데, 뉴욕에서 발생한 9ㆍ11테러 이후로 붕괴된 세계무역센터를 지칭하게 되었다.
더 넓게는 '급격한 변화의 중심' 또는 '사물의 가장 근본적인 시작점'으로 확장되어 사용되기도 하며, 종교적 의미로는 성지 예루살렘을, 더 광범위한 우주의 시작점을 일컫기도 한다. 이렇게 거창한 뜻과 엄청난 포부를 답고 있는 브랜드같지만 사실 그들은 제로의 상태로 시작했기 때문에 이름을 그렇게 지었을 뿐이다. 세계 패션계로 진출한 홍콩 디자이너가 아직 없다는 점에서 그들의 절박한 심정이 드러난다.
프린트로 보자면 「그라운드 제로」는 「마리 카트란주」의 남성형 버전같다. 하지만 형태는 다분히 여성적이다. 대칭형 프린트에 쉬폰 치마나 페플럼, 작은 프릴 등을 넣어 여성성을 더했다. 니트를 기계 장치같은 조직으로 짠 룩은 프린트를 넘어서 소재 변화까지 주어 감동적이었다.

현란한 프린트로 눈을 현혹해 입기 부담스러울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차근히 살펴보면 옷의 형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입는 재킷, 블라우스, 레깅스, 원피스, 니트 등임을 알 수 있다. 위 아래로 민무늬의 옷으로 바꿔 입으면 평소에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아이템으로 독창성과 실용성을 만족시킨다. 형제의 다음 컬렉션이 무척 기대된다.
고학수 전문기자
marchberr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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