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유산 Great Heritage 9 - 21세기에 환생한 파코 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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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ish Arora 마니쉬 아로라

2013-08-22 오후 5:19:57



세상은 아주 천천히 변화하는 듯 하지만, 어느 순간 정신차리고 보면 이미 모든 것이 바뀌어 있는 듯하다. 원하는 정보를 순식간에 찾아내는 스마트폰을 들고 거리를 걸어다니는 모습이 이렇게 빨리 대중화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용자에 따라 그에 적합한 광고를 보여주는 것도 이제는 일상이다. SF 영화에서나 볼 법한 장면들이 현실로 펼쳐지는 것이다. 


21세기에도 이러한 기술의 발전들이 놀라울진대 1960년대에 창공으로 날아간 우주선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얼마나 깊은 인상을 남겼을까 상상해 보자. 전 세계가 두 갈래로 나뉘어 으르렁 대던 냉전시대, 시작은 소련이었다.


1957년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외계로 쏘아 올린 사건은 반대 진영인 미국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로부터 10여년 만인 1969년 미국은 마침내 세계 최초로 인간 달착륙 장면을 전 세계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컬러 텔레비전이 보급되던 초기 단계였다.


물론 1957년과 1969년 사이사이 계속해서 양 진영은 각자 우주과학 기술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무인 우주선, 유인 우주선, 남성 우주 비행사, 여성 우주 비행사, 동물보내기, 지구 궤도 진입 등의 이슈를 만들어 내며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먼 미래의 이야기 같기만한 엄청난 사건들이 우주 공간에서 연출되었다. 당연히 세상에는 여기서 영감을 받은 행위들이 일어났다. 패션도 예외는 아니었다.


파코 라반의 미래주의적 의상들은 이러한 시대 상황과 맞물려 복식사의 한 장을 차지하는 큰 획을 그었다. 1966년 파코 라반은 ‘열두 벌의 입을 수 없는 드레스’ 컬렉션을 선보였다. 골자는 옷을 천이 아닌 소재, 즉 플라스틱, 철판 같은 금속 조각, 종이, 알루미늄 등 패션보다는 산업에 어울릴 법한 재료들로 치환했다.


천과 달리 딱딱한 질감의 재료를 몸에 맞도록 만들기 위해 그가 고안한 방법은 금속 링으로 작은 조각들을 연결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몸의 움직임을 확보할 수 있었다.


1967년 종이 드레스, 알루미늄 튜브 드레스, 모피와 니트, 1969년 가을 메탈 드레스에 이어 리본과 장식끈을 연결한 부드러운 드레스가 나왔고, 1970년대에는 처음으로 인조가죽을 사용하여 드레스를 만들었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싶지만, 무엇이든 처음 시도한 사람은 역사에 남기 마련이다.


이렇게 그가 옷을 천이 아닌 다양한 재료로 접근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건축을 전공했기 때문이기도 헀다. 그는 5,60년대 초까지 파리 국립장식예술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했는데, 이 과정에서 1960년대 전후 건축을 비롯해 예술계에서 진행되던 혁신적 실험들을 접할 수 있었다.


이렇게 건축을 전공하고 패션계에서 활약하는 디자이너들은 천으로만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들과는 완연히 다른 개념으로 옷에 접근하는 구조를 보여주었다. 우선은 재료에 대한 터부나 고정관념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파코 라반의 의상이 일순간에 만들어진 결과물은 아니었다. 그는 학창시절부터 당시 유명 쿠튀르 하우스였던 발렌시아가, 지방시, 앙드레 쿠레주, 피에르 가르뎅 등에 핸드백과 코스튬 주얼리를 디자인하여 납품하였다.


1965년 플라스틱의 일종인 로도이드로 만든 액세서리의 성공은 파코 라반에게 유명세와 상업적 성공을 가져다 줬고, 경력의 전환점이 되었다. 


파코 라반은 1971년부터 오트 쿠튀르의 정식 멤버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99년 은퇴할 때까지 그는 PVC, 특별한 방법으로 주름잡은 금속성 페이퍼, 고무, 라메, 액정 코팅 소재, 플렉시 글라스, 빛을 통과시키는 광섬유 등 새로운 소재 실험을 멈추지 않았다. 기존 관념을 끊임없이 깨고 새로운 소재로 옷을 시도하는 것이 그의 본질이었다.


그렇게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잊혀져 가던 브랜드에 새로이 숨결을 불어 넣은 사람이 마니쉬 아로라이다. 악플보다 무서운 것이 무플이라고, 그 중간에 브랜드를 회생시키기 위해 다른 디자이너가 영입되어 컬렉션을 선보이긴 했으나, 큰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파코 라반」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되어 2012년 S/S 컬렉션을 처음 선보인 마니쉬 아로라는 대부분의 디자이너가 그렇듯이 기존의 브랜드가 가진 가장 특징적인 점을 선택하였다. 바로 조각난 철판 드레스를 21세기 버전으로 선보인 것이다. (사진 1)




가장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은 과거처럼 철판이 모두 같은 크기가 아닌 다양한 크기로 연결되어 여성의 몸의 굴곡에 따라 좀 더 입체감 있게 표현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가능해진 것은 인체를 3차원으로 스캐닝할 수 있는 기술 발전에 의해서였다. 하지만 더 놀라운 점은 사실 이 의상들이 과거처럼 진짜 금속 재료가 아닌 가죽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일부러 색도 은색으로 하여 더 금속판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사진 5)의 경우는 진짜 금속으로 만든 옷 같지만 미세하게 크기와 색이 다른 시퀸을 이용하여 만든 옷이다. (사진 6,7)은 반대로 파코 라반이 과거에 사용했던 금속 원형판을 이용한 옷이지만, 무지개빛의 홀로그램 소재로 바꿨다. 「마니쉬 아로라」가 컬렉션에서 자주 애용하는 소재로 디자이너의 정체성을 드러내면서도 미래적인 이미지를 나타내는데 효과적이다.




광택 있는 소재와 독특한 색의 의상은 마치 지구와 화성, 달 등을 표현하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사진 8,9) 특히 행성같은 모자와 매치 되어 그 인상은 더욱 확고해졌다.




(사진 10,11) 이렇게 미래적이고 우주적인 옷에는 장식도 독특하여 마치 별의 탄생처럼 폭발하는 에너지를 형상화 한 것처럼 보인다. (사진 12) 피날레에는 거대한 의상을 입은 모델들이 나와 런웨이를 가득 메웠는데, 우주 그 자체였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컬렉션의 탄생이었다.



고학수 전문기자
marchberr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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