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식사나 건축사, 미술사 같은 특정 역사-이것도 서유럽 중심이기는 하지만-를 대면하게 되면 으레 양식이라는 단어를 접하게 된다. 사전적 의미로는 ‘시대나 부류에 따라 각기 독특하게 지니는 문학, 예술 따위의 형식’이다. 그런데 이 양식에 대해 사람들이 흔히 오해한다. 그 이유는 이 양식이 지금의 서유럽을 구분짓는 각 나라마다 다 똑 같은 형태로 나타날거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고딕 양식이면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고딕 양식 건축물이 똑 같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론은,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앞서 시칠리아에서 살펴 봤듯이, 같은 이탈리아라도, 북부 지역 이탈리아는 오히려 프랑스에 가깝고, 시칠리아는 지중해 근방 지역들과 유사성을 갖는다. 결국 현대식 나라의 국경 기준 보다 지리적 거리가 중요하다.
여기에도 변수는 있다. 작가의 성향이라는 변수다. 어느 시대나 대세, 유행이라는 것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 편승하지 않고 자신의 개성을 뚜렷이, 묵묵히 지켜가는 작가들도 있다. 이런 작가의 작품을 보고 양식으로 편가르기를 좋아하는 역사학자들은 한숨을 내쉴지도 모른다.
도대체 어느 부류에 넣어야 되느냐고. 결국 각 지역마다 역사, 자연환경, 문화, 정치의 특성이 다르고, 작품을 만든 작가의 성향도 개별마다 다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시대를 관통하는 양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중세’라는 시기가 그렇다. 종교로 모든 것이 귀결된다. 건축, 회화, 조각, 복식까지. 특히 이 시기 회화의 주제는 거의가 종교화이다. 날개 달린 천사, 성인들, 수태고지 등. 하지만 현대 패션에서 이 시기의 문화 유산을 가져다 쓴 경우는 드물었다. 말 그대로 너무 종교적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들이 너무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바로크, 로코코 양식을 벗어나기 힘들어서 그랬을까.
그런데 드디어 중세가 패션에 나타났다. 바로 『까르벵』의 2012 F/W 컬렉션에서였다. 처음으로 감동을 받은 것은 (사진 1)의 룩이었다. 프랑스 브랜드가 로코코, 바로크를 벗어났구나!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이 그림의 출처는 무엇인지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중세시대의 그림이라는 점이다. 그림에 등장한 인물들의 옷이 반팔과 긴팔을 겹쳐 입는 고딕 시대의 의상이기도 하고, 파란 드레스를 입은 인물은 성녀나 천사를 의미하는 것 같다.
이 룩에서 기욤 앙리의 깜찍한 유머도 유추해 볼 수 있다. 치마 끝자락에 위치한 ‘Carven’은 ‘Calvin’과 발음이 비슷하다.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그 칼뱅 말이다.
서체도 마치 옛 자료에 남아 있는 것 같은 서체로 하여 원래 그림에 있었던 글씨처럼 자리잡고 있다. 게다가 자세히 보면 상의셔츠 안에는 목폴라를 겹쳐 입고 있다. 목을 가린 의상들은 칼뱅이 전파한 프로테스탄트의 검약 정신, 또는 청교도에 대한 막연한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여기서 잠깐 『까르벵』이라는 브랜드를 짚어보자. 브랜드 『까르벵』은 1945년 시작된 쿠튀르 브랜드이다. 그녀 자신이 오뜨 쿠튀르 고객이었던 마담 드 토마조는 여성들이 특별한 날 뿐 아니라 평소에도 특별한 옷을 입고 싶어한다는 것을 간파했고, 그녀 자신이 만들기 시작했다. 또한 150Cm 중반인 자신처럼 작고 예쁜 여성을 위한 옷을 만들었다.
60년대 『까르벵』을 위해 만들었던 유니폼은 대다수 항공사 승무원 유니폼의 원형이 되기도 했다.
70년대에는 일본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아담한 여성을 위한’이라는 콘셉이 일본 여성에 적중한 것이다. 그러나 1993년 84세의 나이로 마담 까르벵은 은퇴했다. 2000년대까지 과거 작품과 일러스트로 이루어진 전시가 있었으나 사실상 잊혀질 뻔한 브랜드였다.
그러던 브랜드에 젊은 디자이너가 영입되었다. 바로 『까르벵』의 인기를 되찾게 만든 기욤 앙리이다. 지방시와 폴 카를 거쳐 『까르벵』의 아트 디렉터가 된 그는 순식간에 『까르벵』을 셀러브리티에게 사랑 받는 브랜드로 탈바꿈 시켰다. 포토월이나 카메라 앞에 서야 할 일이 많은 배우들에게 너무 신경 써서 차려 입은 것 같진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 되는 특별한 느낌을 주는 『까르벵』의 디자인이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다시 『까르벵』의 2012 F/W 컬렉션으로 돌아가보자. 많은 칼럼에서 언급되었다시피, 히에로니모스 보스의 ‘세속적 쾌락의 정원’이 프린팅된 의상은 충격적이면서 예뻤다.(사진 7,8) 서양회화를 조금이라도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이 화가가 얼마나 독특한 그림을 그렸는지 알 것이다.
이상하게 변형된 동식물, 중세 시대 사람의 상상력이라고 믿기지 않는 조형물, 기괴하게 표현되는 에로틱한 장면 등 어느 양식에서도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 같은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지만 역시 주제는 종교 성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옛 회화를 패션으로 가져올 때 색 변화는 필수다. 어차피 원본의 색은 누구도 알 수 없다.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몇 백 년이 지난 상태로 이미 색은 원본과 달라졌고, 그마저도 책마다, 인터넷 사이트마다 모두 다르다. 따라서 자신의 컬렉션의 전체적인 이미지에 맞도록 톤을 조절하는 것은 당연하다. 기욤 앙리는 그러한 점에서 이 회화도 컬렉션의 전체적인 톤에 잘 맞추었다.
사실 히에로니모스 보스는 네덜란드 태생의 작가이다. 프랑스 브랜드이자 프랑스인인 기욤 앙리가 프랑스의 전성기인 바로크나 로코코가 아닌 중세를 택했다는 것만도 놀라웠는데, 그마저도 다른 나라의 작품을 썼다니. 약간의 배신감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위대한 유산을 현대적 디자인으로 치환할 때 중요한 것은 국가를 따지기 보다 우선 봐서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고르는 것이다.
중세 옷의 형태를 빌어온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알아 볼 만한 그 시대의 특징적인 건축물의 창, 시대를 연상시키는 소재, 암흑기의 악마 같은 이미지를 가져왔다는 점도 높이 살 만하다.
그 시대 복식의 구조나 형태를 가져오는 것도 유산을 활용하는 한가지 방법일 수 있다. 어쨌거나 고딕 성당의 장미창을 레이저 커팅해 형상화 한 원피스가 다양한 색, 크기, 패턴으로 표현되었으며, 성당을 장식했을 법한 태피스트리가 재킷과 치마, 스커트로 재탄생했다.
특히 진짜 날개라기 보다 그 자체로 날개를 연상시키는 패턴을 어깨에 단 원피스를 입고 등장한 모델이 마지막에 등장했다. 실제로 걸음에 따라 움직이는 날개 같은 이 어깨 장식은 중세 시대로부터 영감을 받은 컬렉션의 피날레를 확실히 마무리 지었다.
②③ 명화 프린트 의상들 ④⑤목을 가려 종교적인 이미지를 주는 의상들 |
⑥⑦장미창 ⑧⑨테피스트리 ⑩⑪날개 |
고학수 객원기자
marchberr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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