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통이란 매우 매력적인 가치이다. 시간이라는 시험대에서 살아남은 검증된 가치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항상 새로운 것에 환호하는 것 같지만, 오래된 것에 보내는 신뢰와 애정도 크다.
디자인에서도 그렇다. 새로움에 대해 환호하는 세상의 시선에 새로움으로 무장한 디자인들은 자칫 흥분하기 쉽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을 견디지 못하는 디자인에 대해서 세상은 냉정하게 모든 애정과 관심을 순식간에 거두어 버린다.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세월을 견디고 영원한 현역으로 활동하는 디자인들이 많다.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디자인들은 세상으로부터 무한한 신뢰를 얻게 된다.
새로움은 환호의 대상이 되지만, 오래된 것은 신뢰의 대상이 된다. 환호성은 쉽게 그치지만 신뢰는 무한하다. 순간적인 환호의 덧없음을 잘 아는 디자이너라면 신뢰를 구축해줄 수 있는 가치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디자인에서도 전통은 생명을 연장시키는 문화적 방부제로서 매우 큰 가치를 가진다. 잘 만들면 환호와 신뢰를 모두 얻을 수 있다.
우선 의자의 모양을 보면 우아하고 귀족적인 느낌이 한가득 눈을 파고 들어온다. 등받이가 인상적으로 자리잡고 있고, 팔걸이가 옆면을 듬직하게 받쳐주고 있는 의자의 전체 실루엣은 베르사이유 궁의 실내를 빛내고 있는 고전적인 의자의 품격과 매우 닮아있다. 직선이 하나도 없는 형태와 흐르는 곡면들이 유기적으로 만났다가 헤어지는 그 리듬감은 로코코 시대의 화려한 장식을 현대적으로 압축해 놓은 느낌이다.
아마 베르사이유 궁을 장식했던 사람이 지금 디자인을 한다면 이런 모양을 만들지 않았을까. 디자이너 필립 스탁은 실루엣과 우아한 곡면의 흐름만으로 화려한 장식과 귀족적 품격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조형적 전통을 아무렇지도 않게 부활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의자는 현대적인 세련미와 단순함의 미덕 또한 잃지 않고 있다. 전통이 녹아 들어있는 우아한 곡면의 흐름은 바로크나 로코코 시대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20세기의 간결한 움직임을 갖추고 있다. 군더더기 없이 매끈하게 흐르는 면들은 공기를 가르며 달리는 자동차나 항공기에서 볼 수 있는 그것과 매우 닮아 있다. 20세기 이전에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조형적 아름다움이다.
필립 스탁의 이 의자가 가진 진면목은 이렇게 복고의 전략 속에서 현대성을 이중적으로 구현해 놓은 점에 있다고 하겠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이 의자의 재료이다. 이 의자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었다. 플라스틱이라면 고전성, 역사적 가치와는 많은 거리를 두고 있는 현대적 재료이다. 값비싸 보이지 않는, 싼 생활용품들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런 재료에 고품격 프랑스 전통을 배양한다는 것은 웬만한 디자이너로서는 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필립 스탁은 의자 형태의 인상을 강화하면서 그런 모순적인 표현들을 해놓고 있다.
미세하게 휘어져 있는 가느다란 금속 다리의 역할이 컸다. 우아하게 휘어진 금속 다리는 플라스틱의 가볍고 흔한 이미지에 럭셔리함을 압축해 놓고 있다. 덕분에 흔하디 흔한 플라스틱으로 만든 이 의자는 크게 어렵지 않게 신분 상승을 한다. 디자이너의 역량은 재료의 한계마저도 뛰어넘게 만든다.
최경원 현디자인연구소 대표
chk869@hanmail.net
- Copyrights ⓒ 메이비원(주) 패션인사이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