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태를 그리는 대신 기운을 그리는 동아시아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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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디자인 기행

2012-12-20 오후 6:41:43

살아있는 자연을 표현한 예술의 도착점, 기운생동


자연이라고 해서 모두가 같은 자연은 아니다. 가령 가뭄에 말라빠진 호수는 자연이긴 하지만 그렇게 좋은 상태의 자연은 아니다. 동아시아의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든 자연을 동등하게 좋게만 본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선조들을 비롯해 동아시아 사람들은 자연의 가장 큰 특징을 살아 움직인다는 것으로 보고, 생동감 있는 상태의 자연을 더 좋아하고 따랐다.
가령 같은 물이라도 잔잔한 호수보다는 콸콸 쏟아지는 폭포나 밀려 들어오는 파도를 볼 때 더욱 살아있음을 느꼈다.



동아시아 사람들은 자연을 궁극의 목표로 삼고, 생동감이 뛰어난 자연에서 추상적인 가치를 발견했다. 이것을 곧 조형예술에 반영했다. 서양이 반자연주의의 길을 걸으면서 이성적인 수학을 조형예술에 도입해 기하학적 추상의 길을 열었다면, 그와 마찬가지로 동아시아의 조형예술에서는 자연이 살아있음을 표출하는 방향으로 추상 조형의 길을 열었다.


조선시대 화가 김명국의 ‘달마도’를 보면 그런 추상성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인물화는 서양에서만 그렸던 것은 아니었다. 동아시아에서도 초상화를 많이 그렸는데, 김명국의 그림에 이르면 인물의 모양새를 따지며 꼼꼼히 그리는 것 보다는 붓을 빠른 속도로 놀려 일필휘지로 그리는 시도들을 했다. 이는 잔잔한 호수보다 폭포나 파도가 더 생동감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인물을 정교하고 사실감 있게 표현하는 것 보다는, 생명감이 가득 응축된 선으로 거칠게 그린 인물이 더 사실적이라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동아시아 예술에서 자연을 추구하는 경향이 어느 단계에 이르면 이처럼 자연의 표피가 아니라, 자연이 가지고 있는 내적 속성을 추상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수준에 이른다.



수직, 수평선과 삼원색으로 그림을 그리면 조형의 본질이 응축되어 표현된다고 생각했던 몬드리안의 접근과 일치한다. 김명국은 자신의 그림이 달마와 닮았던, 닮지 않았던 간에 묵직하고도 빠른 필선의 에너지가 달마의 이미지와 일치하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추상적 접근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아예 형상을 버리고 선의 강약, 운동감만으로 자연의 생동감을 표현하려는 시도를 하기에 이르렀다.




추사 김정희가 행서로 쓴 글에서는 하얀 종이와 검은 먹물들이 한바탕 난장을 펼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뜻을 담은 글자이긴 하지만 붓을 꾹 눌렀다가 가볍게 빼거나, 굵은 선과 가는 선이 대비되면서 자아내는 역동적인 균형, 작은 글자와 큰 글자가 서로 어울려 만들어내는 파격적인 구조의 흐름은 기운찬 자연에서 느낄 수 있는 생명감을 그대로 압축하여 하얀 종이 위에 담아놓은 것 같다. 추사는 그래서 붓을 일부러 거칠게 잘라서 글을 썼던 것이다. 거칠면 거칠수록, 불규칙하면 불규칙할수록 살아있는 리듬을 듬뿍 갖게 된다. 덕분에 종이와 먹 선은 하나로 어울려 대자연과 하나가 되고 있다.


동아시아에서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기하학의 딱딱함에 거부감을 느낀 서양 사람들도 1960년 대에 이르면 동아시아의 기운 생동하는 예술을 지향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잭슨 폴록이다. 그는 기존의 서양화풍에서 벗어나 캔버스에 무질서의 에너지로 가득한 형상을 추구했다.




그는 캔버스 위에서 물감이 든 큰 깡통을 들고서는 아무 생각 없이 뿌리고 다니면서 이런 그림을 만들었다. 재료는 비록 서양의 것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정신은 동아시아의 것과 흡사했다.


해체주의 건축으로 유명한 건축가 프랭크 게리의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에서도 강력한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건축가의 의도는 단지 모더니즘을 파괴하는 것이었는지는 모르나, 그 내면에는 파괴적인 본능보다는 살아있는 에너지가 가득 다가온다. 그래서 유독 이 건물이 해체주의를 지나서 지금까지도 주목을 받는 것 같다. 이런 작품들을 대하면 동서양이 서로 다르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① 생동감이 가득한 파도   ② 김명국의 ‘달마도’    ③ 강약 조절과 선의 유려한 흐름이 돋보이는 김정희의 ‘석노가’ ④ 생동감 넘치는 잭슨 폴록의 ‘자유형상’    ⑤ 프랭크 게리의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


 



최경원 현디자인연구소 대표
chk86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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