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대 위에 달이 떴다. 실루엣만 보이는 기괴한 형태의 검은 그림자들이 푸르스름한 달 아래로 스르르 지나간다. 달이 뜨면 늑대 인간으로 변하는 환상 속의 생명체처럼 푸른 달 아래 기괴한 실루엣들은 구불거리는 길을 흐느적거리며 걸어 나온다.
빅터 앤 롤프의 이번 겨울 컬렉션은 온갖 시적 표현으로 가득했다. 푸른 달과 붉은 달, 검은 그림자, 달빛 아래 구불거리는 하얀 길, 마치 북유럽의 추운 겨울을 바탕으로 한 창조 설화처럼 상상의 나래를 펼칠 모티브가 많은 컬렉션이었다.
구불거리는 길도 의미 심장하다. 직선 거리라면 훨씬 짧았을 길을 숲 속에 난 오솔길처럼 일부러 구불구불하게 동선을 꼬아놓아 길 위를 모델들이 긴 호흡으로 걸어 나왔다. 단순히 옷을 보여주기 위한 무대였다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된 런웨이는 무대 위의 여러 장치와 어우러져 구부러진 길의 당위성을 찾을 수 있었다.

이는 우리나라 산속 절의 입구와 같은 의도다. 속세와 단절하고 피안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만든 일주문과 천왕문 사이의 길. 더 아득하고, 먼 극락의 세계로 가기 위한 길을 암시 하기 위해 그곳에는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는 여러 장치들이 숨어 있다.
우선 일주문 정면에서 보면 저 멀리 있는 천왕문이 문 가운데에 위치해 있지 않다. 일주문과 천왕문의 축이 수직선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길이 대각선으로 구부러져 있기 때문에 대부분 일주문 옆 기둥에 천왕문 건물이 걸쳐져 보인다. 심지어 해인사의 일주문과 천왕문 사이의 길은 밑으로 좀 더 둥그스름하게 파여있어 더 멀어 보이는 효과를 노렸다.
서양의 궁전이나 시청 등 국가의 공공 건축물이 대칭적이고 옆으로 긴 권위적 형태를 갖는다면, 우리나라의 절은 층계를 가져 상승의 효과가 느껴지는 계층적 형태를 가진다. 그것은 그 건축물이 놓여있는 자연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지에 건물을 짓던 유럽인들의 시각으로 자연스러워 보이는 공간을 연출할 때 1차원적인 생각에서 머무르곤 한다.
이 컬렉션에서 한 가지 더 특징적인 것은 배경 음악이다. 백화점이나 쇼핑몰에서 배경 음악에 따라 고객의 걸음걸이의 박자가 달라지며 그것이 구매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은 이미 상식이 될 정도로 배경 음악의 효과는 크다. 그런데 이번 빅터 앤 롤프의 컬렉션의 음악은 대체 어느 장단에 춤춰야 하는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경쾌하고 발랄했던 음악이 푸른 달을 배경으로 흘러 나왔는데, 음향팀의 실수라고 느껴질 정도로 일순간 음악이 달라졌다. 테이프가 늘어난 것처럼 꾀꼬리 같던 여가수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중저음 남자 목소리로 바뀌었다. 모델들은 늘어진 배경 음악과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느릿느릿 걷다가, 또 다시 경쾌한 박자의 음악으로 바뀌었을 때는 원래의 워킹 속도를 맞췄다. 느린 음악에 맞춘 워킹은 모델들이 달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여신처럼 느껴지게 했다.
이렇게 은유적으로 표현된 컬렉션은 마치 전래 동화처럼 덧붙여질 이야깃거리가 많아진다. 마침내 붉은 달이 뜨고, 이 모든 것을 창조한 쌍둥이 창조가가 검은 그림자로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등 여운을 남기는 컬렉션이었다.
고학수 객원기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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