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살기’ 아닌 ‘죽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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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7 오후 6:06:56

지난 주말 동대문을 찾았다. 요즘 한국 패션계가 신인들의 강세라 기대감과 설렘으로 신인 디자이너들이 많이 입점해 있는 모 쇼핑몰에 들어섰다. 하지만 매장을 둘러본 소감은 실망 자체였다. 신진의 젊은 패기도 디자이너 브랜드만의 튀는 창의성도 보이질 않았다. 막말로 보세 브랜드와 섞어놓아 통 구분이 안 될 정도로 획일화된 풍경은 디자이너 매장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백화점 매대와 다름없는 VMD와 감도 없는 상품 구성을 보면서 디자이너 브랜드의 하향평준화도 걱정됐다. 지금부터라도 생즉사(生卽死)가 아닌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로 뛰지 않는다면 젊은 그들의 어깨에 달린 한국 하이패션의 미래는 우울한 잿빛일 것이다.


지난 4년간 서울패션위크는 서울시의 젊은 피 우대 정책으로 인해 어느 때 보다도 많은 신인 디자이너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국내외 편집 매장과 TV 홈쇼핑, 인터넷 쇼핑몰을 넘나들며 백화점 중심의 하이패션 유통에 변화를 가져왔다. 미디어 덕분에 대중적 인지도도 얻었다. 하지만 상업적 테크닉은 향상됐는지 몰라도 창의적 감각은 선배 디자이너들에 비해 아직 멀었다는 느낌이다. 서울패션위크에 참가한 몇몇 신인 디자이너를 보면 옷 잘 만드는 패션 디자이너라기보다 장사 잘하는 패션 CEO에 가깝다. 패션 철학 없는 객기는 양념 잘 밴 숙성된 김치라기보다는 치기어린 겉절이에 불과하다.


패션 디자이너의 가치를 따지는 데 상품력이나 글로벌 경쟁력은 기본 점수다. 차이는 창의성이어야 한다. 그런데 기본 점수부터 차이가 나니 문제다. 몇몇 신인 디자이너는 팔리는 물건을 만들려면 어쩔 수 없다고 항변한다. 그렇다면 디자이너 브랜드라는 타이틀을 반납해야 한다. 무늬만 패션 디자이너인 사장님(?)이 서울시 혜택을 누린다면 같은 세금을 내는 내셔널 브랜드에 대한 역차별이 될 수 있다. 이름을 걸었다는 의미는 프로라는 의미이자 디자인 영혼을 판다는 의미다. 디자이너는 가치 소비에 걸맞는 창의성을 보여줘야 한다.


서울패션위크를 보면 잘하는 신인과 못하는 신인의 차이는 종이 한 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기본기 없는 견습 디자이너, 디자인에 영혼이 없는 맹탕 디자이너, 트렌드를 무시한 디자이너, 과대 포장된 먹튀 디자이너는 구조조정 되어야 한다. 신인들의 한국패션디자이너연합회 회원 가입 신청이 늘고있다. 개중에는 검증되지 않은 듣보잡 디자이너나 먹튀 디자이너들도 있을 것이다. 연합회는 철저한 검증과 확인을 통한 자질 관리를 해야 한다.


신인에게 매너리즘은 독창성의 최대 적이다. ‘죽기 살기’가 아닌 ‘죽기’로 디자인 영혼을 불태워야 한다. 젊은 피가 넘어야 할 산은 한국이 아닌 세계 시장이기 때문이다. K-팝 영향으로 아이돌과 똑같은 복장으로 노래를 따라하는 커버 현상이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들이 팝송을 몰라서 혹은 자국의 가수가 없어서 K-팝에 열광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어떤 나라 음악에도 없는 K-팝만의 독창성 때문이다. 아이돌들이 힘들고 좁은 바늘구멍 오디션을 통과해 얼마나 피나는 연습생 생활을 거쳐 정상이 섰는지, 그리고 올림픽 영웅들이 얼마나 치열한 선발전을 거쳐 국가대표가 되는지를 되새기는 타산지석의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등용문 서울패션위크에 참가하는 신인 디자이너는 점차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제 옥석 가리기를 시작해야 한다. 살길을 열어두고 하는 죽기 흉내만 내는 허수보다 죽기로 올인하는 될성부른 진수를 찾아내는 혜안이 필요하다. 그러면 적어도 국가대표로 뽑힌 신인 디자이너가 해외 컬렉션 무대에서 함량미달로 거부당하는 민망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검증된 젊은 국가대표 디자이너들이 K-팝 1세대들처럼 프론티어 정신과 장인 정신으로 한류 패션의 초석을 다져줄 때 한국 하이패션은 희망 머금은 씨앗을 뿌릴 수 있을 것이다.



유재부 객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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