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자인이라고 해서 꼭 미래를 향해 달려야만 할까? 디자인이 꼭 기능성만을 떠 받들어야 할까? 그동안 디자인에서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들이 슬슬 위태로워진다. 알레산드로 멘디니의 비블로스(Byblos) 소파를 보면 그렇다.
멀리서 보면 누가 봐도 오래된 구식, 다른 말로 클래식한 의자의 자태를 가지고 있는 소파다. 소파의 튼튼한 구조를 지탱하는 부분들의 새겨진 정교하고 아름다운 조각들은 멀리는 17세기의 바로크를, 짧게는 19세기의 짝퉁, 아니 신고전주의를 불러내고 있다. 하지만 골동품적 안목을 가지지 않은 입장에서는 어느 시대에 손을 들어줄지 판단할 수도 없다. 짐작컨대 세월의 흔적을 많이 머금었을 리는 전혀 없는 고전적 스타일의 모사품에 지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긴 가구에 진위가 따로 매겨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의자에 잔뜩 드리워진 전통의 뼈대는 이 소파에 대한 신뢰성을 바짝 부추긴다. 썩어도 준치라고 하지 않는가? 같은 시대 것을 모방하면 저작권을 보호하지 못한 것이 되지만 세월이 지난 것은 전통을 보호하는 일이 된다. 게다가 일단 역사에 확인된 스타일은 그만한 사회적 신뢰감을 태생으로 가지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사람들로부터 기본적인 신뢰감은 챙기게 된다. 웬만큼 빼어난 면모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바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빠르게 부패해 버리는 게 새로운 디자인 아닌가.
그러나 오래된 것의 한계도 만만치 않게 있다. 백화점 맨 위층에 놓여 있는 수많은 앤택 모사품들, 고전으로 치장하고 있는 가구들의 투명한 존재감을 보면 고전의 이미테이션이라는 것이 미적으로는 얼마나 부패하기 쉬운지를 잘 보여준다. 놓여져 있어도 보이지 않으며, 새로 만들어진 것이라도 새로울 수 없는 미적 비극이 발목을 잡기가 쉽다.
그런 점에서 알레산드로 멘디니의 이 소파는 묘한 지점에 놓여있는 디자인이라고 하겠다. 고전에 대한 신뢰감은 분명히 챙기고 있지만, 고전이 가지고 있는 그 고리타분함, 어둡고 칙칙한 세월의 때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밝고 화사한 색과 천에 베풀어진 독특한 패턴은 빼어난 창의력과 신선한 인상, 현대성을 소파 깊숙이 초대하고 있다. 첫 눈에 볼 때는 그저 고전적 가구에 색깔만 화사하게 칠해 놓은 것이구나 하고 넘어갈 만하다. 실제로도 그렇다. 알레산드로 멘디니가 직접 나무를 조각하고 천을 붙여 만들지는 않았다. 그가 한 것이라고는 색깔 지정해서 칠하게만 하고, 소파의 천을 고른 것 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작업이 이 소파의 디자인을 독특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게 매우 많은 것들이 계산되어서 나온 어려운 작업이라는 것은 자세히 보면 알게 된다.
고전의 신뢰성은 그대로 챙기고 있고, 현대적 새로움도 그대로 챙기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색깔이 있다 멘디니는 색깔 몇 개로 이 모든 것들을 얻고 있다. 바둑으로 치면 단 몇 수로 판세를 완전히 뒤집는 그런 묘수를 두고 있는 것이다. 거장들의 작업들을 보면 가끔 이런 묘수들을 보고 정신이 바짝 들 때가 있다. 그래서 짧은 안목들은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다.
최경원 현디자인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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