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션에서 소재는 디자인을 결정할 만큼 중요하다. 저지와 트위드를 재해석하지 않았다면 샤넬이라는 브랜드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며, 플라스틱이나 철판 같은 천이 아닌 소재가 아니었다면 파코 라반은 패션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 소개할 디자이너는 밴디지(bandage)라는 소재로 패션계에 또 하나의 획을 그은 디자이너 에르베 레제(Herve Leger)다. 밴디지란 가는 고무줄을 넣어 짠 탄력성이 있는 테이프를 말한다. 권투나 역도선수들이 관절을 보호하고 근육의 움직임에 도움을 주기 위해 바짝 당겨 감는 붕대를 생각하면 된다. 바로 이 밴디지로 만든 원피스로 에르베 레제는 90년대 바디 컨셔스라는 새로운 패션사조를 만들어 냈다.
운동선수에게나 필요할 것 같은 붕대로 만든 옷은 아름다우면서도 극단의 섹시함을 보여주었다. 어떤 천보다도 몸의 실루엣을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드러낼 수 있는 소재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천을 재단해 다트를 주어 몸매 라인을 살려준다 해도 가슴과 허리와 엉덩이의 그 미묘한 실루엣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는 없다. 하지만 밴디지의 탄력성은 여체의 곡선을 있는 그대로 살리기도 하고 보정해 주기도 하는 더 없이 좋은 소재였다.
프랑스 출신 에르베 레제는 조각과 미술사학을 공부하고 80년대 초반 펜디와 샤넬, 랑방, 끌로에에서 경력을 쌓았다. 1985년 자신의 회사를 설립하고 한동안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활동하다가 1992년 이 밴디지 드레스를 선보이며 혜성처럼 등장했다.
에르베 레제는 아제딘 알라이아와 더불어 ‘바디 컨셔스’라는 패션의 새로운 경향을 만들어냈다. 바디 컨셔스를 직역하자면 ‘인체 의식’인데, 형태적으로는 인체의 굴곡을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의상으로, 자연히 몸매를 의식하게 만드는 옷을 의미한다. 바디 컨셔스 스타일은 신축성 있는 소재가 개발되지 않았더라면 구현되기 어려운 디자인이었다.
1990년대에 활발하게 활동하던 에르베 레제는 프랑스 브랜드로는 처음 1998년 미국의 막스 아즈리아에 매각되었고 2000년 이후 다시 컬렉션을 열며 부활하게 된다. 막스 아즈리아에 의해 다시 선보인 밴디지 드레스는 그 기본 철학을 바탕으로 다양한 디자인으로 변형되어 선보여지고 있다.
단순히 붕대로 온 몸을 감싸는 간단한 디자인이 얼마나 다양하게 변형될 수 있을까 싶지만, 컬렉션을 살펴보면 오히려 소재의 한계가 다양한 가능성을 더욱 실험하게 만드는 원동력임을 알 수 있다. 몸에 밀착된다는 성질이 장점이자 단점도 되기 때문에 모델이 아닌 평범한 몸매의 여성들이 입기에는 부담스러울 수 있다. 감추고 싶은 군살을 감춰 줄 옷의 여유나 주름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각적 착시를 이용해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색, 형태에서 다양한 변주를 시도하고 있다.
그라데이션도 그러한 트릭 중 하나이다.
고학수 현 디자인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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