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조상들은 옛날부터 신언서판(身言書判), 즉 몸가짐, 말솜씨, 글씨, 판단력 등 네 가지를 인물평가의 기준으로 삼았다. 이중 몸가짐이 바로 요즘 패션이다. 상대방에게 신뢰감을 주는 단정한 옷차림의 중요성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옷은 그 사람의 얼굴이다. 그래서 ‘옷은 제2의 피부’라고도 한다. 그만큼 제대로 된 옷차림은 상대방에 대한 최대한의 예의이자 마음가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여론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유력 대권 주자 박근혜의 몸가짐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났다. 유일한 여성 대권 후보라는 점 외에도 9살에 아버지를 따라 청와대로 들어갔다가 갑자기 사망한 어머니 대신 퍼스트레이디 대행 역할을 했던 만 22살의 여대생이 첫 여성 대통령을 꿈꾸는 잠재 미래권력으로 언론의 조명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는 1974년 육영수 여사의 작고 이후부터 퍼스트레이디였던 어머니의 역할과 헤어스타일을 물려받았다. 퍼스트레이디 대행 역할이 몸에 밴 상태에서 청와대를 떠난 후에도 실질적인 집안의 어른 역할에 충실했던 그는 언제나 어머니의 유산인 올림머리와 아버지의 유산인 셔츠칼라 원피스 차림을 고수했다.
같은 스타일에 옷감만 달라질 뿐 1980년대 내내 한여름인 8월 15일에 열리는 고 육영수 여사 추모식 때면 그 옷이 반팔로 변하고, 봄 과 가을에는 긴팔, 겨울에는 원피스 위에 재킷을 걸치는 것이 변화의 전부였다. 80년대는 그에게 권력에 대한 허무와 인간에 대한 배신감을 동시에 느낀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다.
198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의 추도식에서 보여준 검은 색 정장 슈트 안에 셔츠 칼라를 겉 옷 위로 내놓는 스타일을 통해 아버지의 권위와 그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의 미의식 속에 있던 미분화된 남성성을 드러내는 부성 콤플렉스를 표출한다.
이 스타일은 아버지 박정희가 3공화국 시절 공식적인 자리에서 자주 입던 일명 ‘새마을 신사복’ 스타일에서 유래한 듯 보인다. 넥타이를 생략하고 셔츠 깃을 신사복 상의 위로 내놓았던 스타일은 국민복과 신사복의 중간 형태로 1970년대 모든 공무원들이 의무적으로 따라 입었다.
그는 ‘아버지 박정희’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세계에 대한 안목을 갖게 해준 자상한 선배이자 스승이며 나침반’으로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스스로 대한민국과 결혼했다고 말하는 그는 운명적으로 박정희의 ‘영원한 소녀’인 셈이다. 1997년 15대 대선 직전 정치권에 들어와 처음으로 TV에서 이회창 후보 지지 연설을 한 후 폭발적인 반응으로 재방이 되었고 며칠 후 울산에서 열린 유세에서는 그의 연설이 끝난 후 유세장이 울음바다가 되면서 정치권에서 ‘박근혜 신드롬’이란 말이 나왔다.
2003년 한 여론조사에서 여타 여성 정치인들과 3배 이상의 차이를 보이면서 ‘여성 대통령 후보감’으로 부상하며 ‘박근혜 브랜드’는 대세가 되었고, 2004년 한나라당 대표에 선출된 후 치른 탄핵정국 속 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을 건져낸 것은 순전히 박근혜 브랜드의 힘이었다.
이후 박근혜 대세론으로 그의 정치적 파워가 커거면서 패션도 화려하고 강렬하게 변했다.
강한 색상의 통 넓은 팬츠 슈트에 최소한의 액세서리를 통해 연륜을 강조한 스타일은 중대한 결정을 내리거나 결연한 의지를 다질 때 주로 입는 스타일이라 일명 ‘전투복’이라고도 불린다. 평상시에는 딱딱한 슈트 스타일에서 벗어나 우아하고 여성스러운 스타일로 변신했다.
또한 앤티한 수공예 브로치를 자주 착용하고 컬러플한 의상도 자주 소화한다. 지난해 5월 대통령 특사로 유럽 순방 중에는 레이보우 패션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화려한 패션을 선보여 주목을 받았다.
한국에서 자주 입던 짙은 색 바지가 아닌 노랑·오렌지·연보라 등 화사한 색상의 옷과 치마를 주로 입었던 것. 팬츠를 주로 입는 그가 해외에서 화려한 복장을 하는 이유를 묻는 기자들에게 “해외에 대통령 특사로 나와서 여러 정상들을 뵙는데, 그 분위기에 맞는 옷을 입는 것도 예의”라도 말했다. 그는 내가 아는 한 TPO 공식을 가장 잘 실천하는 정치인 중 하나다.
지난해 말부터는 바지를 즐겨 입는다. 비대위원장직 수락 이후 치마는 한 번도 입지 않았다. 위기 속 리더로 거듭나는 상징적인 의미다. 팬츠도 딱 달라붙는 팬츠 대신 통이 넉넉한 디자인을 선택해 활동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작고 여린 체구를 보완했다. 여기에 새누리당의 상징인 빨강이 포인트로 사용된다.
지난 2007년 대선 출마를 선언할 때도 빨간 재킷에 밤색 바지를 입었고, 평창 동계올림픽 개최가 결정됐던 작년 7월6일 평창에서 열린 유치기념행사에도 선명한 빨간색 재킷을 입었었다. 새누리당의 당 색깔이 빨간색으로 정해진 뒤 지난 4·11총선 선거운동에서는 빨간 점퍼 차림으로 전국을 누볐다. 지난 7월 10일 대선 출정식에도 고급스러운 스티치와 세운 깃으로 포인트를 주고 주름으로 허리를 강조한 빨강색 반팔 재킷에 편안해 보이는 그레이 팬츠를 매치했다.
정치인에게 패션이란 그들의 정치관을 뚜렷하게 표현하는 수단이다.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도 원숙하고 노련한 슈트를 통해 ‘룩은 메시지’라는 패션 전략을 정치에 가장 잘 이용한 정치인이었다. ‘강하고 풍족한 미국’이라는 공화당의 보수적인 색채는 그가 공식 석상에서 주로 입었던 짙은 색상의 슈트에 그대로 나타났다.
반면 젊은 정치인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젊고 진취적인 패션은 진보적인 민주당의 이미지 그 자체였다. 그의 젊은 패션은 새로운 변화를 꿈꾸는 미국인들에게 꿈과 희망을 선사했고 더불어 퍼스트레이디였던 재클린 캐네디의 패션도 동반 인기를 끌었다.
정치에서 패션은 사치가 아닌 전략이다. 또한 패션은 개인과 집단의 사회적·정치적 위상과 철학을 내보이는 메시지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 대권 주자들이 보여줄 패션을 잘 살펴보면 그 안에서 정치적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정치판에 무슨 패션 타령이냐며 딴지 거는 분들도 있겠지만 ‘100분 토론’이 있으면 ‘개콘’도 있는 것처럼 다양한 볼거리와 콘텐츠로 대선을 축제의 장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대선주자들의 ‘스타일 배틀’ 만큼 중요한 흥행 요소는 없을 것이다.
유재부 객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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