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옷이나 가방, 구두 등의 패션 제품에 로고가 없어도 어느 디자이너가 만든 것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는 디자인을 가리켜 ‘시그니처 디자인’이라고 한다. 샤넬의 끝단에 라인 처리된 카디건 재킷이나 크리스챤 루부탱의 빨간 밑창, 보테가 베네타의 가죽으로 엮은 제품들이 그렇다.
이러한 시그니처 아이템은 매 시즌마다 끊임없이 변주된다. 하지만 소재와 색, 독특한 형태적 특징의 결합으로 어떠한 돌연변이 디자인이 나와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그것이 시그니처 디자인이 갖는 힘이다.
브랜드에서 이러한 시그니처 디자인을 만들기란 쉽지 않다. 디자이너가 변하지 않는 철학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디자인을 선보여야 하기도 하지만,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디자이너에게 시그니처 디자인은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다. 마치 배우들이 하나의 이미지도 굳어질까 두려워하는 것과 같다.
데뷔한 지 10년이 채 못된 두리 정은 이미 시그니처 디자인이 있다. 저지 소재의 드레이프 된 옷이 그녀를 대표하는 디자인이다. 2000년대 저지 소재의 드레이프 된 원피스의 대표 디자이너 하면 두리 정을 떠올릴 정도다. 이렇게 그녀에게는 시그니처 디자인이 분명 약으로 작용 하고 있다. 그것은 편안함과 우아함이라는 변치 않는 가치가 녹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맛있는 것도 매일 먹으면 질리 듯, 디자이너도 대표작을 매 번 하면 지겨워 진다. 이번 시즌에 그래서 그녀는 이 시그니처 디자인에 색다른 변화를 시도하였는데, 천의 우아하게 늘어진 속성을 프린지로 환원시킨 것이다. 면재(面材)였던 천이 선재(線材)의 프린지로 바뀌면서 본래의 특성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이미지도 만들어 냈다. 어깨와 허리에 고정된 양 끝점보다 긴 선이 늘어지면서 두리 정의 시그니처 디자인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만들어내면서 동시에 허리 밑으로 떨어진 선들은 직선이면서도 움직임에 따라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직선을 만들어낸 것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디자인이었다.
이러한 곡선에 대한 애정을 그녀는 액세서리로 풀기도 한다. 2010년 선보였던 컬렉션은 선재로 곡선에 대한 그녀의 또 다른 실험이었다. 금속성의 선재를 부드럽게 구부린 목걸이는 금속성의 차가움보다는 곡선으로 휘어진 우아함이 더 크게 다가온다.
자세히 보면 구두도 그렇다. 가느다란 금속 체인이 늘어지도록 풍성하게 장식되어 있다. 뒤돌아 들어가는 모델의 구두에서 더 확실히 볼 수 있다. 프린지나 체인의 늘어진 곡선은 천보다 움직임에 더 예민하며 따라서 활기찬 율동감을 가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두리 정의 시그니처 디자인이랄 수 있는 드레이핑 된 천의 본질은 늘어진 곡선에서 오는 우아함이라고 할 수 있다.
두리 정의 컬렉션을 유심히 보다 보면 저지 드레이핑 디자인뿐 아니라 이미 또 다른 시그니처 디자인이 될 가능성이 보이는데, 바로 선으로 표현되는 프린트이다. 마치 펜으로 그린 듯 면을 채우지 않은 꽃무늬 프린트는 여느 디자이너의 꽃무늬와는 차별화되고 있다.
고학수 현디자인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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