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라 왕은 23살에 보그의 최연소 수석 패션 에디터가 되었고 17년간 그 위치에 있었다. 다시 말해 지금의 안나 윈투어 대신 미국 보그 편집장 자리에 앉아 있었을 수도 있단 얘기다. 하지만 베라 왕은 편집장을 거절한 후, 잡지사를 나와 랄프 로렌의 액세서리 디자인 디렉터로 2년간 참여하기도 하였다.
마흔이 다 되어갈 무렵 그녀는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는데, 자신의 마음에 드는 웨딩드레스를 구할 수가 없었다. 때는 바야흐로 1980년대 후반이었으니, 얼핏 큼직한 어깨뽕과 조악한 장식의 웨딩드레스만 떠오른다. 패션계의 최고위층에서 20여 년간 최고급 디자인으로 단련되었을 그녀의 세련된 미감을 만족시켜 주었을 리가 없다.
그녀는 자신의 필요성에 의해 틈새 시장을 발견한 것이다. 베라 왕은 시대의 필요성을 읽는 사업가 마인드가 뛰어났던 디자이너였음을 알 수 있다.
2년간의 준비 끝에 1990년, 그녀는 웨딩 가운으로 자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를 열었고, 곧 유명 인사들이 그녀의 고객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간추려서 소개하자면, 첼시 클린턴, 이반카 트럼프, 앨리시아 키스, 빅토리아 베컴, 에이브릴 라빈, 그리고 미셸 오바마 정도.
한 가지 특이한 점은 피겨스케이팅 의상과 웨딩 드레스의 공통점이 의외로 많다는 점이다. 베라 왕이 어릴 적 피겨 스케이팅 선수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피겨스케이팅을 할 때 입던 옷이 지금의 베라 왕이 웨딩드레스를 만들 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피겨 스케이팅은 온 몸으로 표현 하는 운동이기에 전신을 감싸는 레깅스 부분이 발달하였으며, 자수나 보석으로 마감 된 표면장식이며, 하늘하늘한 치마부분까지, 생각해 보면 웨딩드레스와 공통점이 굉장히 많이 있는 옷이다. 평소에는 입을 수 없는 무대 의상이라는 점까지도.
이러한 과정을 거쳐 그녀는 지금 라이프 스타일 전반에 걸친 디자인 제국을 건설하고 있다. 지금은 향수, 데이웨어, 이브닝 가운, 풋웨어, 란제리, 파인 주얼리 등 다양한 라인도 전개하고 있다.
베라 왕의 컬렉션을 차근히 보면 볼수록 조형 능력과 색, 소재, 컬렉션 구성 등 뭐하나 빠지는 부분이 없다. 지금까지 베라 왕을 웨딩 드레스 디자이너로만 알아 왔다는 것이 아쉬울 정도다.
우선 그녀의 옷은 양파 같다. 곳곳에 매력 요소가 숨어 있어 하나하나 뜯어보는 재미가 있다. 원피스나 드레스 같은 아이템은 충분히 그 자체로 여성스럽고 가녀린 이미지를 주기 때문에 강인한 인상의 야상을 매치하거나, 아예 야상의 칼라 부분을 따로 떼어내 드레스와 결합시켜 신선한 형태의 드레스를 만들었다. 여기에 긴 가죽장갑을 매치해 마치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저녁 파티에 갈 것 같은 이미지를 완성시켰다.
베라 왕이 웨딩 드레스로 알려져 있지만 본인 스스로도 잘 입는 버뮤다 팬츠의 디자인도 컬렉션에 많이 보인다. 무릎길이의 버뮤다 팬츠는 정장처럼 차려 입은 듯하면서도 경쾌한 이미지를 준다. 베라 왕처럼 작고 왜소한 체형의 사람에게 잘 어울리는 아이템이기도 하다.
베라 왕은 웨딩 드레스만 잘 디자인 하는 것이 아니라, 웨딩 드레스도 잘 디자인하는 디자이너이다.
고학수 현디자인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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