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 요한 세례당의 청동문 공모에서 기베르티에게 패배한 브루넬레스키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으며, 자존심에 심한 손상을 입는다. 물론 조각의 우열을 가릴 수 없었던 심사위원회에서는 기베르티와 함께 공동제작을 해달라고 했으나 자존심 강한 그는 수락할 수 없었고 기베르티에게 모든 것을 넘겨버린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컸었다. 여기서 그는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는다.

우리는 그를 원근법을 창시한 르네상스 건축의 대천재로 알고 있지만 이때까지 그는 금속장인이었다. 이 공모전을 계기로 그는 금속장인으로서의 길을 접고 건축가의 길을 걷기 위해 홀연히 로마로 떠난다.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분야로 건축을 택했던 것이다. 3년 동안 그는 로마에서 건축을 공부하면서 잊혀졌던 로마의 흔적들을 답사하면서 새로운 건축을 모색하게 된다.
당시 가장 시대를 앞서 갔던 피렌체의 분위기는 이전의 고딕 시대와는 다른 것이었으며, 그런 흐름은 신세대 브루넬레스키의 정신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미 세례당 공모안에서 기베르티와는 다른 르네상스적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그의 새로운 관심과 취향은 로마의 유적들을 보면서 더욱 분명해지고 제대로 된 길을 찾게 된다.

아마도 그가 당시 보았던 로마의 유적들은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들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포로 로마노에 남아있었던 여러 가지 잔해들은 이미 역사의 흔적이 지워졌었던 로마의 면모를 다시 가늠해 볼 수 있는 실마리였던 것 같다.
지금도 그렇지만 로마 시대에 지어진 콜로세움과 같은 건물들은 단지 건물의 모양만이 문제가 아니라 거대한 규모의 건축을 가능케한 토목기술과 디자인의 구성에 대한 최고의 교과서였다.
이런 건축물들을 실지로 답사하면서 브루넬레스키는 고대 로마의 유산들의 위대함에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열쇠들을 하나하나 찾아 나간 것이다.

예를 들어 원래 로마의 개선문은 크기가 작았지만 이것은 르네상스 건축을 통하여 전유럽에 전파되었고, 하나의 양식이 된다. 브루넬레스키에게는 이런 것 보다는 거대한 실내를 가진 건물의 흔적들이 특히 눈에 띄었다. 왜냐하면 그가 피렌체를 떠날 때 피렌체 대성당, 즉 꽃의 성모(Santa Maria del Fiore)는 아직 머리 위에 꽃을 피우지 못하고 있었고, 이 꽃을 반드시 자신이 피우리라 다짐하고는 로마로 갔기 때문이다.

1366년에 디자인이 끝나고 그 뒤로 짓기 시작한 이래, 건물은 거의 완성했으나 수 십 년 째 돔을 얹지 못하고 있던 피렌체 대성당은 그를 로마로 가게 만든 이유였다. 이 성당의 돔을 내가 세우리라. 그래서 기베르티에게 꺾인 자존심을 회복하리라. 이런 결심을 하고 브루넬레스키는 친구였던 조각가 도나텔로와 함께 로마로 낙향(?)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는 기둥없이 넓은 실내공간을 가진 로마 시대의 건축물들이 남달리 보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피렌체 대성당의 원형 지름은 40m 가량되었는데, 판테온 신전은 43m의 직경을 가진 돔이 얹혀있었다. 그에게는 대단한 참고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3년간의 로마 시기 동안 로마 건축의 잔해들을 통해 로마 건축의 기술적인 것들과 이념적인 것들을 착실하게 공부하였다. 공부가 끝난 후 피렌체로 돌아가 피렌체 대성당의 작업들에 서서히 관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420년에 마침내 이 성당의 돔 설계를 맡으면서 그의 천재성이 거침없이 드러났다.
최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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