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긴 했지만 전후 이탈리아는 왕정에서 민주정치체제로, 파시즘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사회체제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이를 발판으로 재건의 분위기가 싹트고, 아울러 디자인에 있어서도 부흥의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그 결과는 1980년대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전후 디자인의 발전
2차 대전의 종식은 이탈리아에 큰 변화를 가져 온다.
특히 문화적으로는 미래주의적 경향에 짙게 드리웠던 파시즘의 정치적 그늘이 완전히 사라지고 산업에 입각한 디자인들이 자유롭게 나오는 시기였다.
물론 당시 이탈리아의 산업이라고 해봐야 수공업을 바탕으로 한 경공업 수준의 것들이었지만, 이런 산업의 기반은 사실 산업혁명의 소산이 아니라 중세부터 내려오는 전통의 산물이었다.
다시 말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었고 그 만큼 저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탈리아의 산업에는 전통이 스며들게 된다. 물론 2차 대전 직후는 모든 것이 모자라는 시기이다 보니 이탈리아적 전통이 바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초기에는 아무래도 적은 물자를 사용하여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기능적으로 만드는 데에 집중한다.
그러다 보니 60년대까지는 독일식 기능주의가 이탈리아 디자인의 주된 흐름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이탈리아적 끼(?)는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나중에 이탈리아 산업 디자인의 대부 역할을 하게 되는 에또레 쏘사스의 타자기는 그런 징후를 잘 보여 준다.
이 타자기는 타자기로서 사용하는 데에는 불편함이 없이 디자인이 잘 되어있지만 강렬한 색깔과 멋진 케이스는 각박하게 경제성만을 따지는 독일식 기능주의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접근이었다.
회색과 육면체의 변용만을 기조로 여겼던 독일식 디자인과는 확실히 차별화된 것이었으며, 그렇다고 해서 기능적인 면이 위축된 디자인도 아니었다. 플라스틱의 색을 조금 바꾸고 형태를 좀 육면체에서 벗어나게 했다고 해서 돈이 더 많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존의 기능주의 디자인들과는 색다른 다른 디자인이었다.
이 디자인으로 에또레 쏘사스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며, 향후 이탈리아 디자인의 새로운 국면들을 준비하게 된다.
이것은 결국 80년대에 들어와서 모더니즘에 대한 포스트 모더니즘 운동을 국제적으로 이끌게 된다.
에또레 쏘사스와 멤피스
이탈리아 현대 산업 디자인은 2차 대전 직후의 여유 없는 기능주의에서 점차 이탈리아적 색채를 회복하는 역사를 이끌어 왔다.
그것이 196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시기인데 이 시기의 중심에는 바로 에또레 쏘사스가 심볼처럼 자리 잡고 있다. 에또레 쏘사스라고 하면 단박에 멤피스(Memp hys)를 떠올리게 된다.
멤피스는 혁신적인 실험을 통해 이탈리아적 디자인을 국제화시켰다고 할 수 있는 전위적 디자인 그룹이었는데 이 그룹의 수장이 바로 에또레 쏘사스였다. 멤피스 그룹을 통해 이탈리아 산업 디자인은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고, 이탈리아 현대 디자인의 스타일도 완성된다. 이때 멤피스 그룹의 작품들은 지금 봐도 혁신적인 모습이다.
에또레 쏘사스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책장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책장은 책장인데 책장이 가져야 할 성능에 대한 엄숙함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이전까지 세계 디자인을 지배했던 엄숙주의적 기능성이 여기서는 완전히 고려되지 않고 있다. 대신에 디자인에 대한 실험성만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무릇 실험작들이 가지는 과도한 실험성은 또 오히려 느껴지지 않는다. 난해하고 심각하기는 커녕, 디자인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아도 웃음지을 수 있는 그런 휴머니즘이 실험의 한 복판에 자리잡고 있다보니, 실험적이긴 하지만 세계 어느 문화권에서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보편성이 있었다.
화장대도 마찬가지의 휴머니즘 가득한 실험성을 보여주고 있다. 무슨 설치 작품 같기도 하지만 화장대로서 갖추어야 할 부분은 적당히(?) 갖추고 있는 모습이다. 패션 디자이너 칼라거펠트가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한 가구인데, 다양한 재료와 파격적인 형태구조, 그러면서도 고전적 품위가 자욱한 이미지들은 80년대 세계 디자인에 활력을 불어 넣을 만한 모습이다.

이런 디자인들을 내 놓으면서 에또레 쏘사스를 비롯한 멤피스 그룹의 디자이너들, 그 외의 이탈리아 현대 디자이너들은 갖 구운 빵과 같은 향기를 피우며, 기능주의에 절어 있었던 당시 세계 디자인계에 명함을 들이밀었다. 그 중심이 바로 밀라노였다.
최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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