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자연으로부터 만들어졌으니 자연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내가 만든 것들도 자연이 된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에 팽배했던 미학관이다. 어떠한 화려함이나 인상적인 형태 보다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자연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이 동아시아의 예술에서 가장 중요했던 목표였다.
타인과 차별화되는 의도적이고 작위적인 스타일은 목표가 아니었다. 개인의 양식 중심의, 조형적 화려함을 추구했던 서양의 조형예술에서는 전혀 살펴볼 수 없었던 태도였다. 서양의 미학관에서 자연은 다듬어지지 않은 미완성의 재료 상태에 불과하며, 이는 반드시 예술가의 손에 의해 다듬어져서 완벽한 상태로 바뀌어야 할 것이었다. 서양에서 자연은 극복의 대상이지 합일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렇게 서양은 서양대로, 동아시아는 동아시아대로 각자의 미학관에 입각하여 여러 가지 조형예술들을 만들어 오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이런 흐름에 큰 변화들이 디자인들에서 감지되고 있다.
요리스 라망. 네덜란드에서 급부상하고 있는 디자이너이다. 최근에 한국에서도 전시회를 하여 제법 알려진 사람이다. 뼈다귀 처럼 생긴 구조의 의자로 세계 디자인계에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는 디자이너이다. 의자만 디자인 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디자인관이 가장 잘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의자를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격하고 인상적인 형태 이미지나 그런 이미지를 만들 수 있게 한 테크놀로지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이나 형태는 백지 상태에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그 뒤에는 철학적으로나 사회적인 동기들이 있다. 물론 그것을 자신이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경우도 있겠지만, 시대정신의 명령이 자신도 모르게 이런 디자인을 낳게 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런 동기가 설명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의 디자인을 단지 기술의 과도한 표출 이상으로는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발달된 기술이 이런 디자인을 낳게 한 것은 분명하지만 기술이 이런 디자인을 구체적으로 만든 것은 아니다. 그리고 기술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그것을 활용하는 사람이나 사회적 요청이 없다면 제 멋대로 기술이 날고 기고 할 수 없는 것이 사회학적 상식이다. 무엇 보다 이 디자인을 단지 개성이나 기술의 산물로만 대하게 된다면 우리는 이 디자인에 대해 어떠한 문법이나 사회적 맥락을 연결시킬 수도 없으며, 그렇게 되면 어린아이에게 연필을 쥐어 주어서 우발적 무엇인가가 그려진 것과 이 디자인은 하등 달라질 것이 없게 된다.
그 어떤 기술적 알고리즘의 덕택으로 이런 디자인이 만들어졌다고 하더라도 이런 디자인이 고안될 수 있고, 사회적인 이슈가 될 수 있는 데에는 역사적 이유가 반드시 있다. 무엇 보다 2000년 이상을 다듬어지고, 눈 부시도록 아름다운 형태들을 만들던 사람들이 왜 갑자기 이런 카오스적 형태에 눈을 뜨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연’이다. 인간과 대비되는 ‘nature’가 아니라 인간도 포함되는 광범위한 차원에서의 자연인 것이다. 네덜란드 산(?) 디자이너에게서 벌써 자연을 지향하는 동아시아적 미학관이 시도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놀라운 눈으로 바라 보아야 한다. 우리는 현대 역사가 무조건적인 ‘서양화’로 점철된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 디자인은 잘 설명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서예나 회화에서나 시도되었던 가치들이 일상생활에서 쓰는 물건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서양만 보는 사이에, 서양은 이처럼 동아시아 보다도 더 동아시아적으로 동아시아의 미학관을 표현하고 있다.
이건 그냥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인식과 공부가 수반되어야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
특히, 한국 사람들에게는 반성의 계기, 내지는 긴장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기술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디자인을 자연물로 만들고자 하는 정확한 시각이 느껴진다. 아직도 서양화에 전념이 없으신 디자이너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볼 디자인이 아닐 것이다.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디자인이다.
최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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